잘 해내고 싶은 마음
“몸에 힘 빼세요.”
5년 만에 떠난 해외여행. 오랜만에 고르고 골라 택한 여행지는 보라카이였다. 숨이 턱 막히는 갑갑한 사무실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고 생각이 들려던 찰나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바닷속에서 향유고래와 함께 헤엄치며 프리다이빙을 하고 있는 모습. 이거다. 나는 바다에 들어가야겠어. 산소통 없이 내 몸 하나로 바닷속에 들어가 자유롭게 유영하며 한없이 유연하게 물에 몸을 맡기고 싶어. 가끔씩 큰 결정을 매가리 없이 쉽게 해 버리는 나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보라카이 비행기 티켓과 프리다이빙 자격증 과정을 등록해 버렸다. 그렇지. 뭐든 끝을 봐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체험 프리다이빙에 만족할 리가 없는 나는 덜컥 자격증 과정부터 등록을 해버렸고 그렇게 무턱대고 바다로 나갔다.
어느새 나는 산소통 하나 없이 몸뚱이 하나로 보라카이의 화이트비치 바다 한가운데 조각배를 타고 둥둥 떠 있었다. 선생님의 신호를 받고 드디어 입수. 발 끝이 닫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 구명조끼도 없이 튜브 하나만 믿고 둥둥 떠 있는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튜브 하나만 믿고 바다에 떠 있는 건 꽤나 위험한 짓이구나 라는 걸 깨닫자마자 몸은 잔뜩 굳어지기 시작했다. 긴장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며 천천히 호흡부터 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따라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해 보지만 파도가 한 번씩 휘몰아칠 때면 호흡이고 나발이고 숨이 턱 막혀 버린다.
“몸에 힘 빼세요. 아이고 아주 몸이 다 굳었네. 이러면 자꾸 가라앉아요. 몸에 힘을 탁 빼고 뒤로 누워서 파도를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몸을 맡겨요. 괜찮아요.” 반드시 잘 해내고 말겠다는 마음은 끝내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밧줄을 힘으로 잡아당기며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고 바닷속에서마저 이 악물고 애를 쓰던 나는 밧줄에 어깨가 긁혀 널찍한 생채기를 입고서야 끝내 다이빙 포기를 선언했다. 이 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 한마디였다. “몸에 힘 빼세요.” “몸에 힘을 다 뺀 건데요 선생님” “아이고 온몸에 힘이 빡 들어가 있구먼. 어찌하려고 애쓰면 힘이 안 빠져요. 그냥 놔요. 괜찮아요.” 제법 힘을 빼고 파도에 몸을 맡겼다고 생각해도 다이빙마저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굳어 커다란 생채기를 얻은 후에야 포기를 선언했다.
일을 시작했을 때 내 모습이 딱 이랬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어깨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미간마저 잔뜩 찌푸린 채 버둥거렸다. 사회생활은 매일이 시험의 연속이었다. 내가 써내는 의견서와 서면 하나에, 보고서 한 장에, 이메일 한 통에, 보고 한 번에 내가 꽤 쓸만한 일꾼인지 매 순간 평가받고 이런 평가는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만 같은 기분 속에 매일을 살았다. 학창 시절에는 학생 신분에서만 벗어나면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한 학기에 두 번 시험기간을 정해서 그때만 죽어라 공부를 하면 시험이 끝나고, 시험만 끝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과제며 일정을 죄다 미루고 늘어져라 쉴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수험생 시절보다 강도만 조금 낮을 뿐 매일이 시험의 연속이었고 매일의 평가 속에 시험을 치르듯 하루를 살아냈다. 학창 시절 시험을 볼 때에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꽤나 긴 시간 동안 내가 시험을 얼마나 엉망으로 치렀는지 잠시나마 잊고 모른 채 하며 지낼 수 있었다. 아 물론 시험을 치르면서 손은 빛과 같은 속도로 답을 적어 내려가는 중에도 ‘아 나는 지금 시험에 떨어지고 있구나. 이 답은 지금 산으로 가고 있구나’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그럼에도 한동안은 시험이 끝났다는 기분에 취해 자기기만으로 행복함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매일 치르는 시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이 시험을 얼마나 엉망으로 치르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실력이 부족한지 일을 하는 매 순간마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또렷하게 알 수 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상사의 말, 행동, 아니 그 이전에 그들의 눈빛으로 모든 것이 평가된다. 그러다 몰지각한 악덕 상사를 만나기라도 하면 시험을 치르는 족족 그 자리에서 바로 채점을 한 성적표가 날 선 말이 되어 얼굴로 날아든다. “자네는 일을 이따위로 밖에 못하나." 여기에서 더 악독한 사람들은 때로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내가 대변하는 집단 전체에 대해 평가하며 그 집단 전체를 무능력한 사람들로 몰아가버린다. "내가 이래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을 안 쓰는 거야.” 따위의 말과 함께.
매 순간 계속되는 평가 속에서 나는 점점 몸이 굳어졌다. 감사하게도 일에서 만큼은 인복이 있어 대체로 항상 좋은 상사를 만났다. 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잘한다고 말해주고 애써 조금 더 나아지기까지 나의 느린 속도를 기다려주는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늘 온몸이 잔뜩 긴장한 채로 승모근까지 바짝 힘을 주고는 쪼그라들어 있었을까. 누군가 나를 불러내어 “일을 그 따위로 할 거냐”라고 쏘아붙인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나는 늘 잔뜩 웅크린 채 긴장하고 있었다.
나를 향한 높은 잣대는 나에게 엄격함을 강요하다가 어느새 그 잣대를 주위의 타인에게 들이대어 자꾸만 여유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누가 실수를 조금이라도 하거나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같이 화를 내어버렸다. 유독 날 선 말을 내뱉고 이게 아닌데 라며 나를 돌아보는 날이면 고민이 길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매일 온몸에 힘을 가득 준 채로 긴장하고만 있는 걸까. 매 순간이 평가이고 시험을 보는 것 같은 직장생활의 숙명인 걸까.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하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내내 이렇게 웅크리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자꾸만 주어지는 평가에 따라 내 존재 가치까지 함께 오르고 내려가는 이 생활을 나는 계속할 수 있을까.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답을 찾아야 했다.
어김없이 퇴근을 하고 요가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매트 위에서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동작을 이어간다. “애쓰지 않고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잘하려고 애를 쓰면 자꾸만 몸이 굳어져요.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 지 느껴보고 미간에 들어간 힘을 풀어봅니다.”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미간에 힘이 툭 풀어진다. 아 나도 모르게 또 힘을 주고 있었구나. 입을 앙다물어 입꼬리에 힘이 들어가고 잘 해내려는 욕심에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었구나. 아무도 나에게 요가 동작을 잘해야 한다고 다그친 적이 없는데, 선생님마저 나에게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데 왜 나는. 수련을 마치고 매트에 누워 사바아사나 자세로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결국 나는 또 잘하고 싶었던 거다. 아무도 나에게 잘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나만의 요가 선생님은 ‘그래도 잘해야지. 잘하지 못하는 너는 좀 별로잖아.’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내 안에 있는 내가 만들어 낸 악덕 상사는 매 순간 나를 평가하고 ‘이것 밖에 못 하느냐’라며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매 순간 나 스스로를 평가했고 내가 만든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왜 나는 이것밖에 하지 못할까’라며 스스로에게 비난을 했다. 내가 만들어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날이면 ‘왜 나는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한없이 부족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다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데 생각이 미치는 날이면 내가 더 작아져 자꾸만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차라리 시험은 맞고 틀린 정답이라도 있으니 정답을 맞히면 그래도 내가 잘했네 라며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매 순간 마주하는 평가는 내가 원하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목표가 있었고 그 정도에 미칠 만큼 멋지게 일을 처리해내지 못하면 나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목표 미달이라는 평가를 주었다. 게다가 이 목표라는 놈은 어찌나 제멋대로인지 내 주위에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기준으로 자꾸만 더 높아지고, 내가 가 닿을라 치면 ‘내가 여기서 멈출 줄 알았지’ 라며 그새 더 위로 올라가 자꾸만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몸을 피해 나에게 ‘더, 더, 더’를 요구했다.
이래서는 일을 계속할 수 없어.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에게 악덕 상사가 되어 매 순간 채찍질을 가하는데 그런 곳에서 어떻게 그 일에 애정을 쏟고 일을 계속할 수 있겠어. 그렇게 일을 하며 나는 점점 더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도 아껴주지도 않으니 마음이 어긋나기 시작해 그 사랑과 인정을 연인에게서 얻으려 애쓰거나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여 인정을 받고 싶어 자꾸만 나를 꾸미기에 바빴다. 외부에서 부족한 사랑과 인정을 채우려 할수록 일도, 관계도 모든 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멈춰야 해. 내가 나를 지키고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내 마음속에서 채찍질을 가하는 이 목소리를 내가 끊어내야만 했다. ‘내가 나를 다그치지 않아도 괜찮아. 나 만큼은 내 편이 되어 주어도 괜찮아.’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엉망으로 해버리고 그럼에도 괜찮다는 말로 도피해 숨어버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리 그렇게 마음먹으려 해도 나의 부족한 모습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 수밖에 없으니 모든 걸 덮어두고서 그저 괜찮다고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주어진 일을 조금 더 잘 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나만 알아줄 수 있는 나의 노력을 내가 더 가만히 바로 봐주기로, 왜 거기에서 더 잘 해내지 못했느냐며 완벽에 완벽을 기해 채찍질을 가하지는 않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을 손에서 놓아 버리거나 진창으로 만들어버린 후에 ‘이래도 괜찮아’라고 나를 속이고 있는지 혹은 나의 최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를 외치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채찍질만 가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에서 나만의 최선으로 노력을 다 했다면 나 스스로를 평가하고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려 나를 깎아내리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그 사이를 지키는 일은 아직도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이 정도면 되었지 라며 대충 일을 처리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고, 열심히 해야지라고 마음을 먹다 보면 어느새 나에게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냐며 역시 나는 안 된다는 생각 따위로 나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지키면서 타인의 평가를 내 가치로 환원시켜 그 화살을 스스로 주워 담아 나를 향해 찌르지 말되, 일을 할 때에는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그 사이 어딘가 즈음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간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간다. “몸에 힘 빼세요.” 요가 매트 위에서 선생님의 한 마디에 아 어느새 또. 조금 더 몸에 힘을 풀어본다. 내가 나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더 밀어붙여 생채기를 내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나는 오늘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충분히 괜찮다는 마음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