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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Apr 06. 2019

생각의 일기 1주차

2019.03.30. ~ 2019.04.04.

2019.03.30.(토)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역사의 역사>, 유시민


아무도 묻지 않을 것 같지만, 만약 누군가 나에게 “여태껏 읽어본 책 중 첫인상과 내용이 가장 달랐던 책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쓰고 보니 정말 아무도 묻지 않을 것 같은 질문이다), 답은 주저없이 <사피엔스>다. 읽기 전에는 책장을 쉽게 넘기기 어려울 정도의 고담준론이 담겨있을 것 같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편견이 눈 녹듯 사라졌으므로.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완독에 성공했다. 


이 책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왜 하필 사피엔스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지구의 생태 피라미드 가장 높은 곳에 공룡도 아니고, 네안데르탈인도 아닌, 사피엔스가 올라앉게 된 이유. 그리고 자답한다. 사피엔스는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를 실재한다 믿고, 실재한다 믿는 가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회를 이루어 결속력을 유지하기 시작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라고. 사피엔스는 말 그대로 ‘이야기’ 덕분에 전 지구를 좌지우지하는 존재로 성공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사피엔스>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사피엔스라는 존재들을 유심히 지켜본 어느 노인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다. 자칫 일반 독자들이 소화하기 어려울 수 있는 인류와 지구 전반에 대한 ‘빅 히스토리’를 이토록 흥미롭게 풀어낸 작가의 재능이 부러워 배가 조금 아팠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유난히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 읽은 유시민의 책 <역사의 역사>를 통해 본의 아니게 약간의 예습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피엔스>를 다 읽고 어딘가 허전해져 다시 <역사의 역사> 속 유발 하라리 파트를 읽어보았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역사의 역사>,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다. 역사책 몇 권을 훌륭하게 요점 정리한 전교 1등의 필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룬 책을 한 권 다 읽고 그의 서술로 돌아오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읽어낸 <사피엔스>와 유시민이 읽어낸 <사피엔스>가 달랐다. 어떤 의견은 완전히 동의할 수 있었고, 어떤 의견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유발 하라리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후, 그 대화에 대해 유시민과 또 다시 대화를 나누는 재미가 꽤 좋았다. 예습보다 복습이 더 재미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역사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다른 역사책들도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2019.03.31.(일)

-‘난 아직 모르잖아요’, 이문세


친구가 주말에 부산을 다녀갔다. 20대 중반에 부산에서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긴 친구는 종종 부산을 찾는다. 보통은 용무가 있어서이지만 이번엔 그냥 왔다. 나는 오늘 그 친구가 수서행 기차를 탈 때까지 함께 있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온갖 종류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교회와 지금 다니는 직장과 영화와 연예인과 미세먼지의 심각성에 대한 말들을 쏟아낸다. 뭔가 많이 알아서 말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결국 자주 도출되는 결론은 그런 것이다. “모르겠다.” 알아서가 아니라 모르는, 도무지 모르겠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어대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그 친구가 동의하지 않는,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도 내가 서울에서 살게 될지, 친구가 혼자 살게 될지를 이야기했다. 모두, 오늘의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친구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귀에 이어폰을 욱여넣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고, 중년의 이문세가 읊조린다. 제목마저 ‘난 아직 모르잖아요’다. 분명 그는 청년의 시기에 이 노래를 처음 불렀다. 그 때는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젊음의 시기를 다 통과한 이문세가, 아주 원숙한 편곡을 더해 다시 부른 이 노래는 처연하다. 그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게 정상일 것이다. 죽기 전까지도 내 인생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다 죽는 게 인간일 것이다. 그러니 타인과 세상을 안다, 혹은 이해한다는 말은 그저 분에 넘치는 욕심일 뿐이다. 같은 앨범, ‘알 수 없는 인생’을 다음 노래로 듣는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이 또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2019.4.1.(월)

-<골든아워 2>, 이국종


몇 개월 전 이국종의 <골든아워 1>을 읽었다. 실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공개되었던 그의 인터뷰를 인상적으로 읽었고, 그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록을 책으로 낼 예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때부터 기다렸던 책이었다. ‘세바시’ 강연을 들으면서도, ‘JTBC 뉴스룸’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체념과 분노가 꾹꾹 눌러 담겨 있는 이국종의 태도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 근원이 몹시 알고 싶었는데, <골든아워>를 읽으며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국종이라는 사람이, 그리고 그가 만들고 싶었던 한국의 외상센터 시스템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금까지 흘러왔는지가 책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1을 읽으면 2가 읽고 싶어 안달이 나야 정상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외상의학과 외상센터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의 책에서 구현되는 외상의학과 외상센터의 현실은 척박 그 자체여서 참혹했다.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이국종과 팀원들 덕분에 어떤 환자들은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게 되었겠지만, 정작 위급한 환자들을 살려내는 그들의 골든아워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지 않는 엄두를 억지로 내어 2권을 읽는다. 1권에서 저자는 김훈의 <칼의 노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썼는데, 난 오히려 몇몇 대목을 읽으면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떠올린다. 물론 <난중일기>는 닿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지만, <골든아워>는 지금, 여기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이다. 저자가 예상하는 잿빛 미래는 우리를 빗나갈 수 있을까.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깊어지는 고민은 시름이 된다. 



2019.4.2.(화)

-“몸 안 사리고 쓸 겁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얘기”, 한겨레신문(2019.03.30.)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88012.html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강렬한 제목의, 하지만 무척 재미있는 소설을 쓴 작가 박상영의 인터뷰를 우연히 읽었다. 그의 소설 제목만큼이나 많은 부분이 강렬했지만, 특히 이 부분.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다.


“지방에 내려가 소규모 행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도란도란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작가님은 왜 남성끼리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놓으셨나요, 기분 더럽게.”
“그 순간에 제가 계속 웃었어요. 그분한테 내가 화를 냈어야 했는데. 내가 정확하게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나는 웃었구나. 되게 크게 웃었구나. 그런 생각이 뒤이어 들었어요. 제가 태어나서 겪어본 가장 모욕적인 경험이었어요. 나 자신과 모든 퀴어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때 저는 웃어서는 안 됐어요. 이런 순간에도 저는 어떤 책임감을 느껴요.”




2019.4.3.(수)

-<데미안>, 헤르만 헤세


문학동네가 <데미안> 출간 100주년을 맞아 알라딘에 리커버 한정판을 내놓았다. 어려서부터 이상할 정도로 <데미안>을 사랑했던 내가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준다는 ‘데미안 미니 러그’가 지나치게 예뻤다. 떨리는 마음으로 택배 상자를 열었다. 역시 실물도 아름답다.


새삼 ‘100’이라는 숫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100년이란 세월에도 낡지 않고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는 문학의 힘. 100년 후의 독자가 관련 굿즈에 대한 욕심으로 가지고 있는 책을 또 사게 하는 힘. 개인적으로 이 작품과는 아주 어릴 때, ‘청소년 세계 명작 시리즈’ 같은 걸로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읽은 책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데미안>은 단연 인상적이었다. 아브락사스는 도대체 뭐고, 새가 알을 왜 깨는 건지, 평범한 초등학교 5학년생의 그릇으로는 어림없었다. 그 알 수 없음이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30대의 삶을 1년 경험한 작년 겨울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 안에서 그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전혀 알 수 없기만 했던 부분들이 희미한 윤곽선을 드러내며 내 뒤통수를 때렸다. 서른에 읽은 <데미안>은 초등학생이 읽었던 <데미안>과 완전히 달랐다. 


언젠가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에 나왔던 ‘고전’에 대한 여러 겹의 정의가 떠오른다. 그 중 하나. 고전은, 여러 번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 (정확한 출처는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 이번에 산 한정판 <데미안>은 지금 당장 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마흔에,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만나자.



2019.4.4.(목)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패치 아담스>(1998)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다 문득 영화 <패치 아담스>가 떠올라 하루 종일 그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 그런 날이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정직한 제목이다. 말 그대로 변호사인 저자가 우리 사회에서 본의 아니게 실격‘당한’ 이들을 위해 변론을 펼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우아한 변론이 가능했던 것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그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이 사회 앞에 이미 치열한 변론을 펼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6장, 정신질환과 강제입원에 관한 내용을 읽는다. 강제입원은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다. 이유야 어쨌건 환자의 동의 하에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입원 절차가 아니며, 한 번 병원 문 안으로 들어서면 자발적 퇴원이 요원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손과 발이 묶인 정신질환자의 하루를 상상해보는 일은 괴롭다. 혹은 자신이 너무나 멀쩡하다고, 정신질환 같은 건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 누군가가 매일같이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 이의 하루. 그런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출근길 아침에 읽었다. 크레마를 끄고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하면서 자꾸만 병원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러다 무의식에 잠겨 있던 한 영화가 함께 떠올랐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패치 아담스>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헌터 아담스가 자발적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의 말을, 아니 그 어떤 환자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다. 헛소리 정도로 취급할 뿐이다. 헌터는 자신이 다른 환자들의 그 말들을 들어주기 시작함으로써 정신병동에 웃음을 선물한다. 죽어 마땅한 사람인 줄 알았던 스스로의 쓸모를 발견하는 순간, 헌터는 스스로의 이름을 ‘패치’로 명명하고 병원을 박차고 나와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교훈적인 스토리라인과는 별개로, 영화 초반부에 묘사되는 정신병동은 실격당한 자들을 격리하기 위한 수용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환자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위험한 장소일 뿐이다. <패치 아담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정신병원을 부정적으로, 때로는 괴기스럽게 그린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상상 속 정신병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어디에도 개별체로서의 인간을 인식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증세가 다르고, 특징이 다르지만 ‘정신질환’이라는 네 글자 아래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이름은 지워진다. 물론, 이런 글을 쓰는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람이 있고, 그들의 하루가 있다. 


결코 정신질환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집 안에서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중증 장애인들, 휠체어를 밀며 지하철역에서 집단행동에 나서기 위해 모였던 많은 장애인들에게도 역시 그들 각자의 삶이, 하루가 있다. 내 생활 속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인 ‘실격당한’ 자들의 하루를,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덕분에 처음으로 가늠해본다. 그리곤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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