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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Apr 13. 2019

생각의 일기 2주차

2019.4.6. ~ 2019.4.11.

2019.4.6.(토)

-<Robin>, Dave Itzkoff



방에 머무는 시간이 긴 날은 책장을 오래 들여다본다. 사둔 지는 꽤 오래 되었으나 제대로 펼쳐보지 않았던 책들이 극적으로 구조되는 순간이다. 아마존 직구로 공수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공식적인 평전 <Robin>을 처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가 떠난 것은 2014년의 일인데 이 책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다. 4년 간 작가가 들인 노력이 책의 외형에서 이미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양장본에 총 530페이지, 크고 두껍다. 여전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팬의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Carpe diem”을 외쳤던 멋진 선생님 정도가 그에 대한 주된 이미지겠지만(혹은 방황하던 청춘에게 “It’s not your fault.”를 선사한 멋진 어른 정도), 사실 미국에서의 그는 배우 못지않게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꾸준히 자신의 이름을 내건 쇼를 열었다. 짧은 인터뷰 한 편만 봐도 그가 고상하게 무게 잡는 배우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말의 양과 속도가 그야말로 ‘속사포’라 인터뷰어들이 제대로 질문을 던지기 어려워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를 ‘Comic Genius’라고 불렀다.


그런데 평전 작가에 따르면, 그는 절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많은 말 속에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깊은 고민들을 주변과 나누어 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로빈은 과거 여러 차례 알코올 의존 증세를 보여 재활 센터에 입소했었다. 이것은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잘 알지 못했던 그의 어두운 면이다. 로빈 윌리엄스 사후에 비로소 국내 개봉되었던, 어둡고 쓸쓸한 유작들을 보며 나는 극장에서 많이 울었다. <Robin>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아마 조금 더 울게 될 지도 모르겠다.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이너의 심리적 갈등. 화려해 보이는 연예인들의 공황장애 발병. 포털 기사에 댓글을 다는 이들은 이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놀라워한다. 그런데 실은 하나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림자가 있다. 그저 한껏 해를 정면으로 받은 사람들처럼 사회생활을 해나갈 뿐이다. 연예인들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 그럼에도 인간은 겉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판단해버리는 존재다. 무수히 판단하고, 판단당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니 언제나 ‘속단’을 경계할 일이다. 그림자의 존재를 지워버리지 말 일이다.





2019.4.7.(일)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누군가 이 지구를 떠나갈 때, 떠나는 이의 주변에 존재하던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발 딛고 서있던 자리에는 어떤 ‘흔적’이 남게 되는데, 흔적을 많이 남겨둔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의 여운은 자연히 크고 길게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던 한 ‘교회 오빠’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장례식장에서 불현듯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간이라는 형태로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p.6)


그는 타인을 위해 시간을 아낌없이 지불하는 사람이었고, 위 문장을 통과하여 해석하자면 그 말은 곧 자신의 생명을 쪼개어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었다는 뜻이 된다. 2층 복도로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은 그가 정말로 그런 삶을 살았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다가왔다. 그런데 정작 옹졸하고 이상한 나는 그게 싫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다가와서 자꾸만 뭘 주려고 한다고, 부담스럽다고 불평했다. 최선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 오빠는 결국 성공했다. 그토록 짧은 생을 살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밀어내던 나와 같은 사람에게까지 자신의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을 기어이 남겨놓고 떠났다. 잘 지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민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남은 생을 최대한 옹졸하지 않고 이상하지 않게 보낼 것인가. 나는 어디에, 어떤 흔적을 남긴 사람이 되어 떠나갈 것인가.


“그렇다면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같은 책, p.400)


오빠가 먼저 간 그 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내가 조금은 덜 옹졸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다면 좋겠다.





2019.4.8.(월)

-<여행의 이유>, 김영하

왼쪽은 기본 디자인, 오른쪽은 '동네책방 에디션'이다. 가까운 독립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


김영하의 신작 산문이 오늘 오전 10시, 예약 판매를 시작했다. 나는 그의 글을, 그 중에서도 특히 산문을 사랑한다. 직업이 소설가인 사람에게 “당신의 에세이가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조금 실례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나. 소설가의 생애와 무의식을 해체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쌓아 올리는 소설과 달리, 산문으로 만나는 김영하는 우리가 ‘알쓸신잡’에서 목격한 그 사람의 겉모습을 빼닮아 있다. 예의 있고 위트 있고 예리한 시선까지 있는, 그래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산문 중에서도 특히 여행기가 매혹적이어서, 그의 좌충우돌(?) 시칠리아 여행기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한동안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비록 작가는 신간이 여행기는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여행의 이유>라는 제목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그래서였다. 10시가 되자마자 서둘러 예약 구매를 완료했다. 동시대의 작가를 좋아하는 일에는 이런 기쁨과 기대감이 있다.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에 미리 공개된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여행’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여행의 이유> 작가의 말 중, 김영하)


인생이 하나의, 거대한 여행이라는 것. 모든 생명은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이며, 여행자들 사이의 느슨한 연대가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 삶의 터전을 훌쩍 떠나 낯선 곳을 유랑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절감할 사실들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이 당연한 경구들을 작가가 또 어떤 낯선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을지. 기쁨과 기대감을 가지고 17일을 기다린다.





2019.4.9.(화)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부산의 독립서점 [북그러움]에서 ‘나의 인생 책’이란 주제로 공모전을 열었을 때, 나는 주저함 없이 한 권의 책을 골랐다. 그리고 거침없이 썼다. 오늘 그 글을 모아 작은 책자로 만드신 것을 받았다. 활자화된 내 원고를 접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기념으로 그 전문을 아래에 둔다.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 번 해보는 거 어때요?”


늘 재미난 판을 벌여 거기에 꼭 나를 초대하곤 하는 한 선생님이 어김없이 이런 제안을 나에게 해왔을 때, 독서모임이라는 형식보다 더욱 관심이 갔던 건 모임의 주인공이 될 책의 제목이었다. <불안의 책>. 미래에 대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당시의 나에게 그 제목이 꽤나 유혹적으로 다가왔던 건 어쩌면 무척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이런 용감한 제목을 썼나. ‘페르난두 페소아’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비록 그 독서모임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늘의 나는 페소아라는 이름과 그의 책을 알려준 그 선생님께 두고두고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의 저자 소개는 이렇게 쓰여 있다. 페소아는 포르투갈 문학의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고, 자신의 존재를 복수적으로 해체시켜버렸다. <불안의 책>은 그 많은 존재들 중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영혼의 기록이다. 그래서인지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없는 자서전’. 그렇다. <불안의 책>에 페소아 자신의 표면적 삶의 궤적은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떤 자서전보다 글쓴이 자신을 많이 담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것은 문장 하나하나에서 작가가 치열하게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한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두꺼운 책을 사서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가장 놀랐던 부분도 이 지점이다. 그 어떤 에세이, 산문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즉 ‘영혼의 심해에서 길어 올린 것 같은’ 문장들이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나는 그저 황홀한 마음으로 작가가 힘들여 구해낸 귀한 문장들을 잃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눈과 마음에 담을 뿐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방금 전까지도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다 읽은 책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독서는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페소아의 <불안의 책>은 나의 인생 책이라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을 평생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읽어나가기로 결심했고, 이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읽지 않고 있다. 외로울 때, 쓸쓸할 때, 스산할 때, 좌절과 슬픔이 해일처럼 몰려올 때 꺼내어 조금씩 읽는다. 눈으로 조용히 읽어내려 가기도 하고,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놀라운 건, 그럴 때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시나 소설, 수필과 같은 문학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것은 대체로 그 문장이, 독자의 마음 안에 분명 존재하지만 아직 적절한 이름을 얻지 못했던 생각이나 감정에 이름을 부여할 때인 것 같다. 나의 손때가 묻은 이 <불안의 책>에는 밑줄이 다양한 모양으로 이어져 있다. 밑줄을 그으며, 한없이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작가의 탁월한 표현을 통해 내 막연한 감정에 언어가 부여되면서 막연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며, 나만 이러한 감정으로 괴로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1장(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무어라 일컬어야 할지 잘 모르겠으므로 그냥 1장)의 말미에 화자는 인생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여인숙에 머무는 사람들을 이렇게 분류하고 있다. 감옥으로 여기는 사람과 사교장으로 여기는 사람, 그리고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스스로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르는’ 사람. 화자는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겨 방에 가만히 누워 있지도, 거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사교를 나누지도 않는다. 대신 바깥의 면면을 관찰하며 누가 들어주면 좋고 듣지 않아도 무방한 유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 이 비유가 참 좋았다. 가능하다면 나 역시 화자와 같은 사람이고 싶어졌다. <불안의 책>과 같은 멋진 유랑의 노래를 쓰고 싶어졌다. 하루의 생활이 지나치게 어깨에 얹혀있는 날, 어김없이 이 책을 펼쳐들고 그런 바람들을, 또한 지금의 마음을 다시 읽는다. 이 정도면 가히 내 인생의 책이라 할 만 하다.





2019.4.10.(수)

-‘Track 5’, 이소라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소라의 7집은 명반이다. 그리고 명반에는 당연히 명곡들이 들어차 있다. 덕분에 매번 가장 좋아하는 곡이 달라진다. 9번이었다가, 7번이었다가, 4번이었다가, 8번이었다. 지금은 5번이다. 멜로디나 편곡도 아름답지만 그 무엇보다, ‘창작하는 나’로서의 이소라가 여실히 드러나는 노랫말이 아름답다.


음 차가운 말
음 살가운 말
음 따가운 말
음 반가운 말
다 외로운 말
다 외로운 말
다 외로운 말
다 외로운 말




나는 이 노랫말보다 더 ‘말의 외로움’을 잘 표현한 글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새롭거나 모나지 않은 말 주워”서 “내 음을 실어, 내 말을 빌어서” 부르는 이 가수는,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차갑고, 살갑고, 따갑고, 반가운 말이 결국은 다 외로운 말이라는 걸. 이 앨범의 노래들이 모두 제목 없이, 숫자로만 명명된 건 그래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모든 말이 공허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말들은 피로감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럴 때 떠났던 여행에는 자유가 있었다. 모국어로부터의 자유, 모국어가 얽어 놓은 모든 관계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아무리 긴 여행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외로운 말’들이 주는 피로감에 찌들어간다. 그 반복적 순환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한다.





2019.4.11.(목)

-‘Death by Magic’(2018), NETFLIX original



일요일 오후마다 sbs 방송사의 ‘호기심 천국’을 꼭 챙겨보던 어린이였다. 딱히 호기심이 충만한 어린이였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프로그램 자체가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실험도 물론 재밌었지만 내 흥미를 잡아 끈 건 다름 아닌 타이거 마술사가 나와서 마술의 비밀을 낱낱이 까발리던 코너였다. 사람이 들어간 상자에 칼을 사정없이 꽂아 넣었는데 어떻게 상자 속 사람이 무사할까. 구속복을 입은 마술사는 어떻게 근사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것들을 그는 가면을 쓰고 모두 알려줬다. 물론 그 비법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결박하고, 거기서 탈출하고자 애 쓰는’ 마술사의 이미지만큼은 또렷이 새겨졌다. 왜 저런 걸 하는 거야, 싶으면서도 그 스릴에 매력을 느꼈던 거겠지.


우연히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어릴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제목은 ‘Death by magic’. 제목 그대로다. 마술 도중 사망한 마술사들의 발자취를 좇은 후, 사망에 이르게 한 그 마술을 주인공인 마술사 드러먼드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사람들에게 다시 선보이는 것으로 에피소드 하나가 구성되어 있다. 역시 사망의 주된 원인은 탈출 마술이다. 주인공 역시 탈출 도중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을, 그야말로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또 짓궂게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 도대체 왜 저런 걸 하는 거야. 그리고 난 왜 자꾸 이런 걸 보고 빠져드는 거야.


이 프로그램이 가르쳐주지도 않지만, 이젠 ‘어떻게’ 그들이 그 마술을 성공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왜’가 궁금할 따름이다. 기회가 된다면 묻고 싶다. 왜 그러시는 건가요. 멋있긴 한데, 너무 위험하잖아요. 정말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서이기만 한가요. 단 한 번도 무언가에 생명을 걸어본 일 없는, 아니 조금만 아파도 한없이 몸을 사리게 되는 나약한 인간이 탈출마술을 멋지게 성공하는 마술사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아, 그래서 내가 자꾸만 빠져드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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