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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Nov 09. 2019

멍 때리는 삶 / 승수

“너는 멍 때리기 대회가 있다면 거기서 1등을 하고 말거야.”


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날, 창밖을 무심코 쳐다보던 나를 두고 친구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후로 얼마가 지났을까.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9시 뉴스엔 멍때리기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설마 저런 게 진짜 나올 줄이야.


기자가 취재한 현장 영상 속엔 한강 공원에 가만히 앉아 허공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마다 돗자리를 펴고 각양각색의 자세로 멍을 때리고 있었다. 전부다 무표정에 반쯤 눈을 감은 얼굴이었다. 눈을 감은 사람도 있었다. 우승은 눈꼬리가 쳐져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은 눈을 가진 어떤 가수가 차지했다.


이젠 하다하다 저런 걸로도 상을 주는구나. 맨날 최고, 최다, 최연소만 외치다 이젠 그걸로 더 이상 재미가 없으니, 이번엔 1등에서 최고로 멀리 떨어진 사람을 1등으로 만들어주는 획기적인 대회라니.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회사 회식자리였다. 1차, 2차에서 한창 달리고 이제 막 3차로 넘어온, 밤 11시 반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과장은 사원들에게 회사 생활의 팁이랍시고 본인의 영웅담을 한껏 풀어놓는 중이었다. 바로 맞은 편에 앉았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감자탕 고기를 젓가락으로 뜯고 있었다.


“야, 너 형 말 듣고 있는거지?”


순간 모든 눈이 나를 주목했다. 나는 분명 잘 듣고 있었다고 항변했고, 죄송하다고 했다. 멋쩍은 웃음도 애써 지어보였다. 그러자 과장은 내가 똑똑하다고, 멀티태스킹을 참 잘한다고, 회사에서도 보면 얘처럼 일 착실한 애도 없다고,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내 말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하는 것 같다고 큰소리를 냈다. 나는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1등 사원이 되기 위해 일을 했지만 그 꼴이 별로 탐탁치 않았나보다. 과장은 가벼운 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래야 친해지기 편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나는 너무 진중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 나는 이 일이 맞는 걸까. 복잡하고 어렵다. 그냥 바보같이 멍 때리기나 하고 1등을 하면 좋으련만.


by. 승수 / 9월 1주차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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