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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Nov 20. 2024

첫 캐럴

버스를 타고 작업할 곳을 찾아가던 길에 비가 내렸다. 집에서 나올 때 하늘이 흐려 보였는데도 우산을 따로 챙기지 않았었다. 차창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원래 가려던 목적지보다 먼저 내려버렸다. 가까이 있는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사실 어느 곳에 가든 상관은 없었다.


익숙하고 한적한 프랜차이즈 카페 안에서 올 겨울 첫 캐럴을 들었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한 달 정도 남았고, 우리 집은 아직 트리를 꺼내지 않았지만 조만간 먼지 쌓인 상자를 꺼낼 것이다. 1년 동안 잠들어 있던  알록달록한 오너먼트와 구겨진 철사 나무와 빛을 머금고 있던 전구가 모두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문득 어린 시절 부모님과 보낸 크리스마스의 풍경이 떠올랐다. 엄마는 종이로 만든 장식을 커튼 위에 달고, 커다란 철사 트리를 꺼내 흰 솜으로 만든 눈을 올리고, 눈사람도 달고, 동그란 종도 달아주셨다. 나는 거기에 사슴을 매달고, 색종이로 만든 장식을 달고, 전구가 깜빡일 때 얼마나 뜨거운지 손으로 만져보며 깨달았다. 아직 낡지 않았던 전축에서는 나이 든 남자 가수의 캐럴과 간혹 영구가 부르는 우스꽝스러운 캐럴이 번갈아 가며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손을 뻗어 머리맡을 만져 보았다. 엄마와 아빠가 몰래 준비한 선물 상자는 반짝이는 포장지에 감싸여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크리스마스를 몇 번 겪은 후에 우리 집은 낡아갔다. 내 기억도 함께.


자취 시절의 캐럴은 거리와 카페의 배경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도 있었고, 혼자일 때도 있었지만 캐럴을 들을 때는 언제나 포근한 기분이었다. 딱히 종교가 없어도, 갈 곳이 없어도, 가진 돈이 없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의 집과 '유브 갓 메일'의 케슬린이 마시던 모닝커피 한 잔,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트리 아래 가득 쌓인 선물 상자들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따뜻해지고는 했다.  


다시 지금 앉아있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캐럴을 듣는다. 아직 올해는 한 달 하고도 열흘 정도 남아있고, 내게는 아직 마치지 못한 소설이 남아있고, 아직 안부를 전하지 못한 친구들이 남아있다. 내 앞에 놓인 라테도 아직 식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자. 남 것이 있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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