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나는 늦은 사춘기가 왔고 못된 표정 못된 말은 골라하는 모~옷 된! 년이었다.
한 번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퉁퉁부은 다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화가 났다.
힘들어서 녹초가 되어있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화가 솟구치는 그 상황이 말이 되냔 말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떠오르는 얼굴은 아빠였다.
'우리 집이 돈만 많았어도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 하고 살아도 되는데'
'아빠가 용돈만 많이 줬어도 내가 남들 눈치 보면서 일할 필요 없는데'
'이렇게 해봤자 또 학자금 대출은 여전할 텐데'
내 고된 노동의 원인은 아빠였다.
무뚝뚝함의 표본이었던 아빠는 막내딸의 뒤늦은 사춘기에 항상 노심초사해했다.
그다음 날 아침, 독이 바짝 오른 막내딸의 표정을 그냥 넘겼을 리 없다.
어제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났는갑네 딸?
터졌다.
어. 아빠 때문에 내가 참~~ 힘들게 산다.
등짝을 맞아도 몇 번은 후려 맞아야 했다.
저렇게 골라도 못 고르겠는 나쁜 말을 골라서 뱉고 나면 그 기분이 좋냐고?
진짜 더럽게 화가 난다.
내가 뱉어놓고 내가 또 화를 못 이겨서 한참을 씩씩댄다.
그때는 그랬다.
힘들면 남 탓하라고 했잖아.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고.
그렇게 남한테 던져놓으면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더 화가 났다.
20대 후반이 된 지금, 조금씩 경제력을 갖출 준비를 하는 나는 아빠한테 매달 용돈을 드린다. 어쩌다 한 번씩은 매달 드리는 용돈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는 또 스멀스멀 못된 성질이 나오려고 한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내가 못 나서다.. 내 월급이 고작 그 정도라서 몇 십만 원에 쪼잔 해지는 거다..
내가 주체가 되면 훨씬 마음이 편해진다. 차라리 나를 탓하면 속이 후련해진다.
나는 내가 바꿀 수 있다. 나는 나를 성장시킬 수 있고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하면 벌 수도 있잖아. 누가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하면 되는 거다.
출처가 불분명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격한 감정은 쉽게 남 탓으로 돌리기엔 리스크가 크다. 남 탓으로 돌리려다 결국 나한테 돌아올게 뻔하다. 오늘 내가 못난 거 인정하면 내일은 좀 이뻐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