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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 남PD Jun 04. 2020

#19. 일단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시험관 시술

'아기 갖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어?'

시술실 안.


"다 됐습니다. 배아는 잘 삽입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손을 꼭 잡으며 시술이 잘 됐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그때는 마치 임신 축하 소식을 듣는 것 마냥 기뻤다. 그렇게 나의 자궁 속에 들어온 '몽실이'는 10일 후, 첫 번째 피검사에서 86.5라는 아주 애매한 수치를 안겨주었다.


"착상이 정상적으로 되었다면 100 이상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100이 좀 안돼요. 그래도 늦게 올라가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오늘 주사 맞으시고,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잘 챙겨 드세요. 그리고 이틀 후에 다시 피검사하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첫 시술 후, 임신 테스트기를 보고 싶었지만, 9일간 잘 참았고 병원 가기 전 날 떨리는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해 보았다. 누워서만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생활을 했다. 그것도 즐겁게. 그런데 테스트기는 한 줄. 매직아이로 봐야 거의 보일까 말까 한 선이 엷게, 아주 엷게 비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거의 없다 해도 무관할 정도의 흐린, 나에게만 보이는 선. 예상은 했지만 착상 여부를 알 수 있는 hCG 수치는 100이 되지 않았고, 착상을 유도하는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임신도, 비 임신도 아닌 상태로 나는 병원 문을 나섰다. 회사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며칠씩 쉬어가며, 병원을 오가며 했던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힘이 빠졌고, '내가 너무 돌아다녀서 그래... 그래서 몽실이를 못 지켰어...'라는 생각이 나를 더욱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내일모레, 또 와야 해...."
"그래, 내가 오전에 반차 낼 수 있는지 한 번 볼게. 같이 오자."
"아냐. 피검만 하면 되는데 뭐. 나 혼자 왔다 올게."
"혼자 올 수 있겠어?"
"응. 가까운데 뭐. 왔다가 출근할게요."
"여보, 걱정하지 마. 우리 몽실이, 잘 버텨 줄 거야."
"응! 동글동글 귀엽게도 생겼으니까. 잘할 거라고 생각해. 엄마가 너무 많이 움직였나 보다. 엄마 이제 더 조심할게."


그렇게 이틀 후, 나는 또 병원을 찾았고, 피검사를 했다. 이른 아침 피검사를 하면, 점심이 지날 무렵 검사실에서 연락이 온다. 썸 타는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병원 검사실에서 올 전화를 기다린다. 그것도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안녕하세요, OOOOO예요. 피검사 수치 나와서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시험관 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마치 통과해야 할 '테스트'로 생각한다. '첫 번째 피검 통과', '두 번째 피검 통과' 이런 식으로. 나의 두 번째 피검 수치는 88.9. 만약 임신이라면 이틀에 두 배 이상 수치가 올라야 하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몽실이. 야속하고 답답하고 좌절했다. 출근 전 진료를 봐야 했기에, 다른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았고, 그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는 더 답답했다.


"지금 현재 수치가 내려간 게 아니기 때문에 아기가 착상을 안 했다거나, 계류 유산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수치가 쭉 올라가는 애들이 있으니까요. 아기가 착상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주사를 맞으시고 드시던 약은 계속 드실게요."


매우 매우 친절한 선생님의 자상한 설명. '느리게, 아주 느리게 착상하고 있는 몽실이를 엄마인 내가 포기하면 안 되지...' 하면서 다시 주사를 맞았다. 왼쪽과 오른쪽 엉덩이를 번갈아 가며 맞아야 하는 유산방지 주사는 맞고 나면 마치 엉덩이에 돌덩어리를 넣은 것처럼 맞은 부위가 딱딱하게 뭉친다. 게다가 끈적한 주사는 들어갈 때도 얼마나 아픈지... 그나마 집에서 혼자 놓을 수 있던 주사도 이쯤 되면 병원에 와서 맞아야 한다. 회사 출근 전 항상 이 병원엘 들러야 했다. 다행히 나는 사내 병원이 있어 주사약을 맡겨 두고 매일 지하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여보!!!!! 피... 피가 나와!!!!!"


약간씩 피가 비쳤다. 또다시 나는 좌절했다. 병원에 전화를 했다.


"피가... 비쳐요... 어떡하죠?"
"그게 착상혈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요, 오늘 병원에 바로 내원 가능하실까요?"


착상혈? 그런 게 있구나... 병원엘 갔더니 여전히 우리 몽실이는 착상을 위해 노력 중이었고, 수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바로 임신을 유지하는 주사를 끊게 되고, 그러면 2-3주 후에 생리를 시작한다. 주사를 중단하면, 자연스럽게 계류 유산이 되는 것이다. 좌절... 이쯤 되니 나의 몸상태가 우리 몽실이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고, 아주 미미하게 변화하는 몸 상태를 인터넷에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인터넷 글 하나에도 일희일비하고, 하루에도 수백 번 좌절과 희망의 선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또다시 이틀 후.


"자기야, 괜찮아?"
"응... 아니... 여전히 혈이 비쳐. 병원 가야겠어"
"지금 어디야?"
"지금, 수유실에 누워있어요. 팀장님한테 말하고 가려고... 너무 힘들다. 이런 상황이..."
"에고, 우리 여보. 내가 같이 갈게. 나랑 가자."
"아냐, 자기 휴가 너무 많이 냈잖아. 또 시술할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혼자 갈게요."


그렇게 다시 병원을 찾았고, 피검사 결과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몽실이와는 이별을 해야 했다. 시술을 하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태명을 지었고, 마치 몽실이가 벌써 내 몸에 자리를 잡은 것 마냥 신이 났고,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렇게 몽실이와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시험관도 아무나, 다 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된 우리 부부는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7개월이라는 시간을 흘러 보냈다.


'까똑!'


제부: "광복이에요~!""짠!"
(임테기 사진)
동생: "저희, 임신했어요..."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가족 단톡 방에 동생의 두 줄짜리 임테기 사진이 올라왔다. 광복절, 쉬는 날이라 각자 낮에 시간을 보내고 저녁때 만나기로 했는데... 동생네가 깜짝 발표를 했다. 가평 한가로운 카페에서 그 톡을 보았다.


"어..... 여보! 쏘이네 임신했나 봐! 너무... 잘됐다..."
"아, 그래? 축하할 일이네..."
"그러네... 축하할 일이다, 정말. 좋겠다..."


"우와!!! 축하해, 정말!!! 너무 잘됐다!!!"


축하 톡을 보냈지만, 내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보, 너무너무 축하할 일인데, 내 동생이 엄마가 된다는데, 왜 나 눈물이 나지?"
"괜찮아, 여보. 각자의 때가 있는 거야. 울지 마..."



그렇게 한 참을 울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 애써 웃고 있지만, 우리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너무너무 슬펐다. 아니 기뻤는데 너무 슬펐다.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에겐 오지 않던 아가가, 2년이나 늦게 결혼한 동생에게 먼저 찾아왔다. 사실 그날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기로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따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터다.  


"다행이야... 같이 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게 아니어서."
"그러게. 오늘 저녁에 케이크 하나 사서 파티하자."
"응, 그러자. 우리 소이, 어른 다 됐네."
"그러네, 이제 처제가 더 어른이네."


그렇게 동생의 임신 소식에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몽실이와 이별을 하고, 7개월 만에 냉동해 두었던 두었던 냉동 배아를 이식했다. 담당 의사를 바꿨고, '강남 삼신 할배'로 불리는 의사에게 시술을 받았다. 수치 1. 나의 두 번째 시험관 시험관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난자와 정자를 추출해 시험관을 했고, 3개의 배아를 얻는 데 성공했고, 쌍둥이가 생기든 말든 3개의 배아를 모두 주입했다. 하지만 수치 0.1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얻었고, 또 한 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


"안되나 봐. 우리는 금슬이  너무 좋아서 우리 둘이 살라는 부처님 뜻인가 봐. 우리 둘이 그냥 살자. 재밌게!"
"그래, 여보. 우리 재미있게, 지금보다 더 재밌게 살자. 애 없으면 어때!"
"응, 없어도 지금 너무 행복한데 뭐. 우리 여행이나 다니면서 살자."


그렇게 우리는 한이라도 풀듯 매주 국내 당일치기며, 1박 여행을 다녔고, 여름휴가는 허니문으로 갈 만한 곳들만 골라서 다녔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우리의 밤톨 같은 조카, 광복이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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