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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쓰니 Oct 25. 2017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ep17.

그리지_쓰니랑


그가 골라준 립스틱.



“우리 그저께 본건데 되게 오래 된 것 같다. 그치”

“왜 그럴까. 내가 멀리 있어서 그런가”

주말에 그가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토요일 아침에 보고 비행기타고 슝 제주도를 갔다가 이틀이 지난 오늘 월요일 아침이다. 거진 매일 봐서 그런가 하루 못 봤는데 꼭 며칠을 못 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퇴근하고 내가 근무하는 회사 앞으로 온 그는 메고 있는 크로스백을 열어서 손을 넣어 주섬주섬 뭔가를 찾더니 샤넬이라고 크게 적혀있는 하얀 쇼핑백을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뭐야!!!”

친구랑 짧은 여행을 다녀오면서 내 선물을 사오는 그의 마음이 너무 예뻤다. 내 얼굴의 온 근육이 활짝 펴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다. 하얀 쇼핑백 안에는 작지만 빛나는 검은색으로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샤넬 립스틱이 들어있었다.

“어머”

“너 립스틱 좋아하잖아. 진한 색 립스틱은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네 입술 색 살려줄 수 있는 걸로 골랐어. 그냥 어울리는 걸로 산거야”

그는 이 립스틱을 고르게 된 이유를 말했다. 좋아하는 내 반응에 그도 기분이 좋은 듯 괜히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나도 굳이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자리잡고 있는 내 얼굴의 근육들을 풀 필요는 없었다.

“와 나 샤넬 립스틱 처음 써봐”

진짜 샤넬 립스틱은 사본 적도 써본 적도 없었다. 일단 가격은 비싸고, 그 정도의 값어치를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기도 했지만 백화점 립스틱계의 독보적인 제품은 입생로랑 아닌가. 샤넬이라...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두렵기도 하고, '비싸니까 좋긴 하겠지' 라는 생각과 '그냥 받기에 너무 비싼 거 아닌가' 라는 등 다양한 생각이 순식간에 쑥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난 립스틱 뚜껑을 열어 색을 확인했다.

애매했다. 제형 자체가 진한 느낌은 아니었고, 발색력 또한 진할 것 같지 않았다. 당장에 써보기에는 이미 다른 립스틱을 발라놨기 때문에 발라볼 수는 없었다.

“립스틱은 입생로랑인데... 흐흐 그런데 왜 샤넬에서 샀어?”

진짜 궁금했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봐도 샤넬 립스틱을 추천하지는 않을 텐데.

“샤넬 매장에 사람이 제일 많더라고, 그리고 색도 다 확인해봤는데 이게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다 확인해봤다고?”

내 말에 그가 자신의 왼쪽 손을 나에게 쭉 내밀었다. 제대로 지웠는지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느낌상 희미하게 발려져 있는 립스틱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립스틱을 고르기 위해서 제주도 공항 면세점 샤넬 매장에서 립스틱을 하나하나 빼들어 손등 위에 발라보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자 웃음이 났다.

“이거 너무 비싼데……. 고마워. 나 이거 비싸서 살 생각도 안 해봤어.”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와서 리무버를 솜에 묻혀 입술을 닦았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온 몸은 피곤했다. 멍하게 앉아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입술에 남은 립스틱을 닦아낸 다음 샤넬 립스틱을 꺼냈다. 무슨 색일까.

부드럽게 쓱쓱 잘 발렸다. 한번 터치하고 나자 불그스름하게 투명한 느낌의 반짝거림이 묻어났다. 예뻤다. 청순한데 뭐랄까 살짝 빛나고 싶은 청순함이랄까. 방금 솜으로 강하게 닦아내 거칠어진 입술이었지만 샤넬 립스틱의 촉촉한 제형감에 막 자다 일어나 통통하게 생기 있는 입술이 연출됐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아까 그가 했던 말이 불현듯 귓가에 들려왔다. 진짜 나한테 잘 어울리는 걸 골랐구나. 이상하게도 한쪽 마음이 찡해졌다. 진짜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아. 얼굴에 가득 지어지는 미소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거울 속에는 샤넬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지_쓰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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