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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쓰니 Aug 11. 2017

우리 길은 정해져있으니까, 다른 길은 천천히 가

ep12.

그리지_쓰니랑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내 머리카락이 심하게 흩날린다. 스노우글로브 안에서 펼쳐지는 하얀 눈꽃처럼 하늘에서 아주 작은 빗방울이 뿌려진다. 한여름에 쌀쌀한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오늘.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차갑진 않지만 강하게 분다.


나는 땅을 보며 천천히 한 걸음 한걸음 걸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있는 길만 따라 걸었다. 일직선으로 쫙 뻗은 그런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길이 맞겠거니 하고 걸었다. 잠깐 고개를 들어 앞을 봤을 때 보이는 블록 끝. 꺾이는 지점까지만 가면 되겠거니 하고 다시 고개 숙여 걸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내가 걷던 길이 꺾여있어 고개를 먼저 내밀어 옆으로 난 길을 확인했다.


한걸음 한 걸음. 다시 한걸음 열심히 한걸음 한 걸음. 계속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 길이 엄청 긴 길인 거 같더라. 방법이 잘못된 것 같더라. 나는 나름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늦어도 그렇게 천천히 라도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크게 유턴하고 있는 것만 같을 때. 다들 다른 길로 나보다는 빠르게 가고 있는 것 같을 때.


난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내 선택에 대해서 잘했던 잘못했던 '이게 운명이겠지' 생각하는 편이다. 시간을 돌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아마 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생각하며 그때의 그 선택으로 인한 지금의 내가 운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날은 왠지 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드는 생각에서 우울함의 정점을 찍은 날이랄까. 누구도 원망할 순 없지만 나 혼자 괜히 속상해졌다. 내 인생에서 잘 되고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뭔가 이룬 것도 없는 것 같고, 이도 저도 제대로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잘해보겠다고 나름 용쓰고 살아왔는데 그게 잘못된 방법이었나 왜 이렇게 삶이 답답한 건가 우울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내 상황을 숨기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정확히 뭐 때문에, 어떤 것 때문에 우울한 건지 그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 같아. 그렇다고 어떤 게 맞는 길인지도 모르겠어. 이 방법이 틀린 건 아닌 거 같아서.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게 아닌 거 같아. 내가 우울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 관계야, 솔직히 그렇잖아. 너와 내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 우린 타이밍이 맞지 않는데, 내가 아직 현실을 몰라서 이렇게 바보 같은 건가 싶단 말이야, 이 만남을 계속 이어가는 게 나중에 생각했을 때 얼마나 바보스러웠던 거였지 할까봐 그런 것도 날 우울하게 한다고”


에이 모르겠다 싶어 이래서 내가 우울해, 이래저래 해서 내가 속상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렇게나 씨불였다. 진심 아닌 진심이었다.


잠시 날 바라보던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우리의 길은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다른 길은 천천히 가”



우울한 표정으로 현실적이기 때문에 더 모질게 느껴지는 말들을 내뱉던 나는 그의 말에 무슨 말인가 했다. 이마에 잔뜩 찌푸렸던 인상이 풀어지진 않았다. 그는 잠시 멈췄던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네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 중에서 남자, 결혼 이런 문제는 생각 안 해도 된다는 거야. 우리 길은 어차피 정해져있으니까. 이 길이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다른 길은 천천히 가도 된다고”



남녀관계는 어찌 될지 모르는 거라지만, 하루아침에 님에서 남이 된다고 하지만, 그의 말이 ‘지금’ 진심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나중에 서로의 마음이 변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지금 당장 속상한 나를 잘 위로해 주는 것도 그의 진심 담긴 말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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