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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May 02. 2024

작가가 될까, 장수를 할까

[노파의 글쓰기] '무너짐의 순간' 넘어서기

***<내가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발전시킨 글입니다***


작가이긴 하나 소설가는 아니고, 극본 작가이긴 하나 시나리오 작가는 아닌, 애매한, 그러나 창작을 안 하는 삶은 견딜 수 없는, 그런 것치곤 자잘한 생계 활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으로서 저는 요즘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동아신춘문예 차석으로 기세 좋게 한 해를 시작하였으므로 올해는 뭘 좀 써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루키와 한강의 근사한 소설을 읽으며 감히 나두나두! 를 외치며 불타는 창작열을 쏟아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2월에 있는 큰 강의를 잘 마쳤고, 3월에 라디오 극본도 잘 넘기고 나면, 이후 두 달간은 별다른 생계 활동 없이도 생활이 가능한 돈이 수중에 떨어질 터였습니다.


좋아, 3월 말부턴 두 달 동안 글만 제대로 써봐야지! 

이것이 저의 2월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3월 스무날 동안 열심히 드라마를 썼고, 피디인 친구에게 슬쩍 보여줬더니 네가 쓴 것 중 제일 잘 썼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쑥스러울 법도 한데, 염치 따위 저만치 내던질 만큼 재밌는 내용입니다.


재미의 핵심은 여자주인공에게 구애하는 부유한 남자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움에 있습니다.


남자는 굴지의 엔터테인먼트사 대표로 설정하였는데,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회사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를 모델로 했고, 대표의 외모는 요즘 한반도 잇맨, 방 선생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저는 방 선생을 보면서 언제나 “역시 부자는 외모 따윈 신경 쓰지 않아. 오직 가난뱅이만이 다이어트에 목숨을 걸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살이 권력이다, 이 가난하고 말라빠진 것들아”와 같은 주옥같은 대사도 써넣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대한 살집은, 그가 태생부터 부자인 사람, 즉 재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그는 부를 일구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가 살이 쪘고, 벌어들인 돈을 정신없이 쓰다가 또 살이 찐 겁니다. 


즉 그의 살은 보통 사람들에겐 거대한 부의 과시이지만, 재벌들에겐 악착스러운 개천용 출신임을 보여주는, 우월함과 열등감을 동시에 지닌 복잡한 살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동시에 열등감으로 꽉 차 있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희망찹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반짝반짝하게 닦아나가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고군분투 덕분에 그렇습니다. 건전하고 밝은 결말입니다.


그러나 피디에게 까였습니다.

피디는 부자 캐릭터를 보자마자 방 선생이 떠올랐는데, 그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억울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예리한 사람인지에 대해, 자신이 한 번 만나봤다는 사실을 두 번 강조하며, 오래도록 강변했습니다.


이봐요, 내가 지금 방 선생 다큐 쓰는 거 아니잖아. 이미지만 가져온 거라고, 이미지만.

(그리고 지금도 그의 이미지를 차용한 캐릭터는 우스꽝스러우면 안 된다고 여기는지 궁금합니다만?)


그러자 그는 제 원고의 모든 것을 트집 잡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명문대를 나온 여자주인공이 남의 집에서 가사관리사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 인물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씨 뿌리듯” 더 심어놔야 된다.. 등등.


명문대생이고 자시고, 쌀이 떨어졌는데 월 3백짜리 가사관리사를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고, 모든 인물의 전사를 “씨 뿌리듯” 심어 놓으면, 그거 싹트고 다 클 때까지 방송을 두 시간을 하겠다는 건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거대한 벽과 마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벽이 단순히 의견의 영역에만 있는 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작가가 20일 동안 쓴 원고에 대해 기획료조차 주지 않겠다고 버티고 서 있는 엄연한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이러려고 계약서도 안 쓰고 원고부터 주라고 하는 겁니까? 피디 취향에 안 맞으면 20일씩 일한 사람한테 한 푼도 안 주기 위해서?


이 확고한 갑질의 벽은, 시간적으로는 나의 3월을 잡아먹었고, 금전적으로는 나의 한 달 치 생활비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두 달간은 글만 쓰겠다는 연초의 계획이 날아갔고, 저는 다시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메일에는 꼼꼼한 피드백을 주셔서 고맙다며, 원고는 잘 폐기해 달라고 썼습니다.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나니 한동안 제가 싫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도 고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RT 생각은 안 하냐, 피디가 그렇게 감이 없냐? 억대 연봉자라 현실 감각이 없는 거면, 나가서 청년들 나오는 영화라도 좀 봐라였는데, 혹시 몰라서, 어쨌든 그가 내 밥줄이니깐, 고맙다고 한 겁니다.


저는 단지 쓰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뭔가를 쓰기 위해서는, 어느 한순간은, 생계가 무너지든 말든 그 폐허 위에서라도 쓰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폐허 앞에서,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며 돌아서고 맙니다. 그래서 작가이긴 하나 소설가는 아니고, 극본 작가이긴 하나 시나리오 작가는 아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녀석이 되어버렸습니다.


대체 소설가들은 이 '무너짐의 순간'을 어떻게 뛰어넘은 걸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 순간을 뛰어넘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안다는 점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분들은 아마 오랜 빈곤과 화병과 우울에 시달리다가 폐허 위에서 일찍 돌아가셨을 겁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뭔가를 쓰고 싶기도 하는 동시에 제 명에 죽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또 제대로 쓰고 싶기도 합니다.

올해는 부디 이 난제를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쑥갓은 진작에 난제를 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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