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PA May 09. 2024

예민한 마흔의 일기

[노파의 글쓰기] 드릴과 펜치,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

요 며칠 마음이 매우 예민해 있었습니다.

시도하는 것마다 결과를 맺지 못하고, 허리는 아프고, 지금 쓰고 있는 것에 확신을 갖지 못하여 생긴 문제였습니다.     


한껏 예민해진 마음은 우울과 슬픔의 단계를 차례대로 거쳐 마침내 분노의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걸리기만 하면 다 줘 패버리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데, 때맞춰 주문한 포스터가 왔습니다. 부처님이 그려진, 대형 패브릭 포스터였습니다.     


저는 이거다, 라고 생각하며 오래간만에 드릴을 손에 쥐었습니다. 부처님을 어떻게 하겠다는 패륜적인 이거다, 가 아니라 벽을 줘 패버리겠다는 의지의 이거다, 였습니다.  

   

드릴로 있는 힘껏 벽에 구멍을 뚫어 나사를 다섯 개나 박아넣었습니다. 고작 얇은 천 쪼가리를 거는 일이었다.     

저는 연장을 든 김에 현관의 등도 손보기로 했습니다. 등이 센서로 작동되어 책을 들고 거실을 뱅글뱅글 돌 때마다 불이 600번은 껐다 켜졌다 하는 통에 정신병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마음이 예민한 것도 다 이 센서 등 탓인 듯했습니다.     


펜치를 들고 전선을 몇 번 뺐다 꽂았다 했더니 간단한 수학문제가 풀리듯 반짝, 하고 불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현관은 제가 스위치를 켤 때만 밝아집니다. 전등 하나 마음대로 됐을 뿐인데, 어쩐지 어긋난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 것만 같았습니다.     


드릴로 힘을 빼고 펜치로 전선을 만지는 일. 이 작은 성취 덕분에 기분이 한결 산뜻해졌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예민할 때는 드릴과 펜치만 한 게 없는 듯합니다.


부처님 포스터를 산 이유는 이제 슬슬 창문을 열고 생활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열린 창틈으로 제 방을 들여다보는 모든 이에게 자비를 드리기 위해…는 어림도 없고, 혹여 밤에 침입하려는 자가 있거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기 위함입니다.     


밤에 보면 포스터가 몹시 무섭습니다. 원래 더 무서운 포스터를 걸려고 했으나 옆집 아기 엄마가 놀랄까 봐 참았습니다.     


포스터 따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방에 1.8m짜리 부처상을 걸어두고 사는 사람 집엔 딱히 침입하고 싶을 것 같지 않다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종교에 미친 사람은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미친 사람이 살고 있으므로, 침입자가 이 포스터를 어느 범상치 않은 집구석의 문장(紋章) 혹은 미친 자의 서식처를 나타내는 표지임을 깨닫고 곱게 돌아가 주면 좋겠습니다.     


그편이 우리 모두에게 이로울 것입니다.



이전 02화 작가가 될까, 장수를 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