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uterus, no opinion)
요 며칠 자궁에 관해 생각했다. 실은 작년부터 생각했다. 갖가지 방법을 써도 내 삶에 별로 협조적이지 않은 녀석에 대해. 역시 떼버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사를 찾았다.
자궁을 떼버릴까 하는데요..
아.. 그렇게까지 생각하신 거예요?
의사는 자궁을 뗀다고 해도 난소는 살아있으니 갱년기가 빨리 온다거나 성관계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다고 했다.
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부정출혈의 해결책으로는 자궁을 떼는 게 가장 확실했다.
그런데도 의사도 나도 망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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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자기 얘기를 했다. 유방암 수술을 받아서 약을 먹고 있는데, 약이 자궁암을 유발할 수 있어서 떼는 게 맞긴한데, 역시 못 떼고 있다고 했다.
합리의 왕이라는 의산데, 서울대에서 공부를 할 만큼 한 그인데도, ‘자궁을 뗀다’는 심리적 장벽 앞에서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데도.
그래서 내 결정이 너무 가뿐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 건 그 흔한 용종 하나 없이 깨끗한 녀석이었으니깐. 심지어 벽의 두께도 이상적으로 얇았다. 그러니 미레나 시술을 받으면 부정출혈 같은 건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출혈이 있을까, 의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쪽 분야에서 가장 수술을 잘하는 은사님께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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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는데, 15년전 쯤에 한의사 친구가 했던 말이 마치 계시처럼 둥실 떠올랐다.
수지야야야, 자궁은 절대 떼면 안 된다아아아. 자궁은 여자한테 제2의 심장이다아아.
양의사가 들으면 이 무슨 토템 설화 같은 말이냐 할 테지만, 몸이란 원래 비과학의 영역이다. 과학과 합리대로라면 내 몸에선 이토록 오랜 기간 부정출혈이 일어나선 안 됐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라면 자궁을 뜯어내는 문제 앞에서 누구나 그래도... 하게 된다. 몸은 철저하게 감성의 영역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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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치과에 갔다.
더럽게 비과학적인 내 치아는 기껏 치료하고 비싼 거 씌워놨더니 뒤늦게 신경이 날뛰어 다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드릴로 뚫고 메우고 씌우는 과정을 또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프고 비쌌다. 애끼고 애꼈더니 소득 분위 최상위층에게 다 털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간호사도, 의사도 여자라서 자궁에 대한 견해를 수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간호사 선생님,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자궁을 떼는 게 좋을까요?
제 주변에 뗀 언니들이 여럿 있는데, 그렇게 편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근종있는 거 또 안 좋아지면 아예 떼버리려고요.
플러스 1점.
의사 선생님, 자궁..?
아니, 왜 그렇게 과격한 생각을 하시죠? 그럼 갱년기도 일찍 올 수 있고, 골밀도도 낮아져서 안 좋아요,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봐요.
마이너스 10점.
뚜벅이에게 골밀도는 너무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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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같아선 자궁은 뜯고 이는 뽑아버린 후 홀가분하게 출가하고 싶으나, 그럼 부처님도 '얘는 좀..' 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미레나만 뜯고 피임약을 먹기로 했다. 부정출혈을 막는 가장 손쉽고, 귀찮고, 각종 부작용을 동반하는 방법이다.
그래도 이번에 자궁 탐구를 하며 한 가지 위안이 됐던 사실은, 세상에 사연 없는 자궁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부정출혈도 이 정돈데,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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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궁,
내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장기야,
이번엔 한 발 물러서마.
그러나 네 주인은 과격하다.
잘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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