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 문장 레터에는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을 담고 싶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역시 읽기 쉽지 않다. 처음 읽었을 땐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놓쳤던 것들이 그 섬세한 주름을 활짝 펼치며 달려드는 바람에 한 문장 읽을 때마다 훌쩍거리고 있다.
“천연스럽게 칠판지우개를 책가방에 담던 정대. 이건 뭣하러 가져가? 우리 누나 줄라고. 너희 누난 이걸 뭐에다 쓰게? 글쎄, 이게 자꾸 생각난대. ... 한번은 만우절이라고 애들이 칠판 가득 글자를 써놨더래. 총각 선생이 지우느라 고생할 줄 알았더니, 주번 누구냐고 호통을 쳐서 누나가 나가서 열심히 지웠대. 다들 수업하는데 혼자 복도에서 창문 열어놓고 이걸 막대기로 탁탁 털었대. 중학교 이년 다닌 것 중에, 희한하게 그때가 제일 생각난다지 뭐냐.”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한 누나는 만우절에 혼자 칠판지우개를 털던 일이 생각날 거라는 상상은 어떻게 하는 걸까. 동생은 그런 누나를 위해 칠판지우개를 몰래 가방에 담아갈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울먹이는 정대를 달래며 정미 누나가 갔을 만한 데를 적어봤던 공책도 앉은뱅이 책상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야학, 공장, 가끔 가던 교회, 일곡동 오촌 당숙네. 다음 날 아침부터 정대와 함께 그곳들을 찾아다녔지만 정미 누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누나가 갔을 만한 데가 너무 삭막하여 또 한참을 서러워했다.
다정한 정미와 정대 남매.
둘 다 죽었다.
5.18때 군인들이 모두 죽였다.
국가에서 기록한 5.18 사망자 수는 162명.
이 기간 신고된 실종자 수는 448명.
그러나 계엄군이 사용한 실탄은 51만여 발.
*
나의 사촌들은 모두 광주에 살지만, 양가 모두 전라도 태생이지만, 우리 집안에서 5.18 때 죽은 이는 한 명도 없다.
왜냐하면 다들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6.25때 작은 집이 빨갱이에 몰살당했고, 큰아버지와 큰고모가 총에 맞아 죽었고, 할머니는 한쪽 눈을 잃은 기억 때문에 모두 죽은 듯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쪽으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두 다리가 끼어 반신불수가 된 삼촌이 계신다. 그래서 양가 모두 몸을 사리는 것을 지상 최대에 과제로 삼으며 산다.
사람 많은 곳에는 가지 않고, 정부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힘 있는 놈들이 으름장을 놓으면 피한다. 비겁함이 몸에 뱄다.
그래서 이번 내란 때 내가 몇 차례 시위에 나간 것을 알고 아버지는 거의 뒷목을 잡으셨다.
*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나도 겁이 많고 불안이 깊다.
매일 겁내고 바들바들 떨면서 러시아에도 가고, 할렘가에서도 살고, 혼자 며칠씩 여행을 떠난다. 번들번들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여차하면 토낄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후들거리는 다리로 세상을 디디며 나는 뭘 증명하고 싶은 걸까?
전두환은 계엄에 성공해 정미와 정대 남매를 죽였고, 그걸 본 엄마와 아빠 세대는 가만히 있는 것을 시대의 미덕으로 삼으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윤석열은 계엄에 실패하여 나는 벌벌 떨면서도 이틀 후에 땅끝마을 해남으로 간다. 두렵지만 기어이 간다.
아마도 나는 갈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것 같다.
바들바들 부들부들 습습후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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