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기억
컴퓨터가 용량이 거의 다 찼다고 몇 달 전부터 신호를 보냈다. 느려지고 예고 없이 꺼졌다. 500G짜리 컴퓨턴데, 250G씩 두 파티션으로 나뉘어 있어 그중 한 파티션만 쓰고 있었다.
컴퓨터를 사자마자 두 파티션을 하나로 통합해야 했는데,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4년이 흘렀고, 그 사이 250G를 써버리는 바람에 지금 통합하려면 250G를 백업해야 한다.
그러느니 지우자. 지우는 김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USB도 전부 정리하자. 그러다 15년 전 유학 준비하던 시절의 자료를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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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니, Curriculum Vitae니 하는 단어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폴더마다 v1, v2로 끝없이 정리된 파일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열어보니 고급 어휘를 능숙하게 사용한 자기소개서와 학업 증명서들이 쏟아져나왔다.
2010년, 스물다섯의 나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달랐다. 중산층 남자와 결혼한 1년 차 새댁이고, 더 큰 부와 명예를 위한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노파가 아니라 김수지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흔적을 전부 지워버리겠다는 듯 매일 다섯 시간씩 자며 성공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석사 논문 학기에 유학 준비를 병행했고, 1년 만에 영어 점수를 따고 Columbia에서 입학승인을 받았다. 미국에 가서는 잠을 더 줄였고, 더 많이 공부했다.
그렇게 악독하게 몸과 정신을 혹사시킨 난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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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체세포는 한 달이면 전부 교체되고, 간세포는 일 년이면 바뀌고, 근육세포는 15년이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2010년의 나는 체세포는 물론이고, 간과 근육까지 전부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바뀐 현재의 나는 무엇에도 애쓰지 않는다. 시간 낭비라고 여기던 산행을 위해 하루를 모두 쓰고, 더 높은 성취를 위한 충전용으로 다니던 여행을 일상의 목표로 삼게 됐다.
그때 나를 설레게 하던 것들은 더는 나를 붙들지 못하고, 열정과 야망은 그때 모두 소진시켰는지 텅 비었다. 삶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고, 성공한 사람보다는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의 삶에 더 관심이 간다.
오직 뇌만이 그때의 나와 같아서 1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기억으로 연결한다. 기억이 없다면 나는 스물다섯 살의 그 젊고 패기 넘치는 여자를, 정말 기 빨리는 인간이라며 이력서에 적힌 내용만으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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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엔 우이동에서 북한산을 올랐다. 내가 늘 오르던, 은평구 방향의 북한산과는 정반대 편 방향이다. 한강 작가 소설에 수유리 방향에서 오르는 북한산과 절 이야기가 종종 나오길래 그쪽에서 본 북한산은 어떤 모습일지 늘 궁금했었다.
조금 더 빨리 산의 품으로 안길 수 있고, 그래서인지 더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수유리 쪽의 절은 화계사와 도선사, 두 개가 유명한데, 그중 도선사를 가보았다. 곳곳에 기도 접수 팻말이 붙어 있었고, 접수하는 곳은 은행처럼 세련되고 체계화돼 있었다.
산사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없어 꽤 실망스러웠는데, 맞은편 건물 1층에서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공양(점심)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모습에 다시 불심이 솟았고, 공양도 한 그릇 얻어먹었다. 소박한 맛이었다. 절밥을 먹었으니 시주도 하고 챙겨온 믹스 커피도 한 잔 타 마셨다. 15년 전의 나라면 이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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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리학자는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모든 순간들이 연달아 이어 붙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무한한 순간들 속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한 사람으로 이어주는 것은 오직 머릿속 기억뿐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체세포가 변했고, 간과 근육이 바뀌었고, 가치관이 달라졌다.
15년 전의 나는 세상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15년 후의 나는 그때의 내가 조금 가엾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짱 멋있고 기깔나고 좋아죽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산과 나무와 고요, 그리고 그 안에서 글을 쓰는 것임을 알았을 뿐이다.
해남으로 가는 티켓을 또 끊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가까이 두며 살기로 했다.
ps.
두달 살이 하러 가기 전에 내 식충식물들을 죽일 수 없어 아파트 화단에 전부 옮겨 심었다. 열 개 넘게 이식했는데, 그 중 사진 속 녀석, 딱 하나만 살아남았다. 가장 강한 놈이 골라졌다.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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