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방지노트

나를 죽인다는 것에 대하여

by 엽서시

너무나도 나를 죽이고 싶다. 그렇지만 자살은 싫다.

-자살 카페의 한 게시글-


1.나를 죽인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방안에 갇혀서 생각해 본 결과는 바로 총살이다. 그러니까 그때의 내 방은, 무언가 퀴퀴한 것이 공기 안에 가득했고, 뜨겁다 싶을 정도로 더웠고, 죽고 싶은 나와 죽이고 싶은 내가 서로를 가둔 곳이자 서로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법정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사형에 관한 책을 보곤 했다. 연습장에는 말 그대로 나를 죽이는 법을 수십 번 쯤 연습 했다.

커터 칼과 수면제와 줄넘기 줄과 허리띠 같은 것을 그려댔다. 사실 방 한 구석에 포장용 노끈을 꼬아둔 것도 있었다. 방 찬장에 박아놓은 못도 있었다. 매듭을 짓는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방은 점점 뜨거워졌고 거의 하루 종일 켜져 있던 내 컴퓨터도 점점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너무나도 머리가 뜨거워지면, 열에 죽어버리는 개구리처럼 뒤집어져서 자버리곤 했다. 이렇게 자는 도중 죽는다면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꿈 없는 꿈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그 수많은 망상들 중 역시나 총살이 최고였다.

방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방문을 빠끔 열면 내가 나의 머리를 우악스레 잡아당긴다. 당황한 내게 자루 같은 것을 뒤집어씌우고, 나를 발로 차대면서 어디론가 끌고 간다. 자루 안은 당연히 내 호흡과 땀으로 가득 차 덥고 지독한 공기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내 목을 조르는 건 농도 짙은 당혹감, 불안감과 두려움. 머릿속으로 한참을 생각 하던 그 때 갑자기 내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이 사라진 것을 불현듯 느낀다. 뭐야, 어떻게 하려는 거지? 이 자루를 벗겨줘. 날 다시 내 방으로 돌려보내 줘.

싫어.

왜?

난 너니까.

탕탕탕.

그리고 꿈틀꿈틀.

수도 없이 그런 꿈과 환각을 보았다. 깨어난 후에도 지금 내가 죽어버린 나인지 아니면, 죽여 버린 나인지 한동안 헷갈리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 문제는 그런 환각이 아니라 그 환각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깨어나면 등줄기와 방바닥 사이는 땀과 물방울로 흥건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와 살인범과 피해자가 뒤섞인 환상 속에서 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환상을 보았다.

나는 어딘가의 건물 옥상에 올라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나를 가둔 이 방에 갇혀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방에 갇힌 뜨거운 공기가 나를 달구어 댄다. 시원한 바람을 맞던 나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며 환한 하늘을 올려 본다. 방에 갇힌 채 나는 전등을 두어 번 올려다보고 그리고 작은 창에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목에 걸린 쌍안경으로 건너편 건물 이 층에 있는 방을 내다본다. 나는 방에서 건너편 건물의 옥상을 바라본다. 쌍안경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검은 총을 쥔다. 난 건물 옥상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총 위에 달린 스코프로 방 안에 있는 여자를 겨눈다. 여자가 내게 총을 겨누는 것을 바라본다.

숨을 멈춘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방아쇠를 당긴다.

탕.

그리고 꿈틀꿈틀.


2. 요정

선명한 꿈이었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안보여서 잠깐 놀라기도 했다. 방은 조금 서늘해져 있었다. 아, 어느새 밤이 된 거구나, 하고 깨닫는데 조금 시간이 들었다. 컴퓨터 하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아직 내 몸이 살아서 돌아가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 아직 살아 있구나. 아직 돌아 구나, 그래서

다시 잠이 들었다. 등 언저리가 흠뻑 젖은 채로.

빛을 보았다. 이상한데? 하고 물었다.

“뭐가?”

아, 아니, 자기 전에는 어두웠는데 꿈속이 밝으니까 말이야. 뭔가 이상하잖아. 그러자 그 빛이 쿡쿡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꿈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

말이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꿈속이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새로 만나는 게 짜증나고 어색했다. 꿈속에서까지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이렇게 어색한 순간이 싫었다. 아냐, 어차피 이건 꿈 속이니까 이 녀석은 새로운 누군가가 아니야. 나의 일부에 불과해. 낮에 하던 망상이라던가, 낮에 한 게임이나 인터넷 소설 같은 데서 나오던 그런 거겠지 뭐.

“아닐걸, 아마?”

뭐? 그럼 넌 어떻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지? 다시 그 빛이 쿡쿡 웃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다. 덥다. 밤인데도 이렇게나 더운 게 저 밝은 빛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를 훔쳤다. 꿈인데도 그 미끈한 느낌이 생생했다. 그럼 넌 뭐지? 요정이라도 되는 건가? 그러자 크흠, 하고 빛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침묵이 있고 빛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비슷해. 요정 같은 거지.”

거짓말, 이다.

“네 자살을 막기 위한거야.”

순간 난 할 말을, 아니 할 생각을 잊어버렸다. 어색한 공기가 새끼 물고기들처럼 한참을 손가락과 목을 스치고 지나간 후에야 난 뒤이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뭐야, 요정이라더니, 그럴 바에야 소원 같은 거나 들어달라고. 한 세 가지 정도라도 말이야.

“센 척하지마. 이 것도 소원을 들어주는 거 아냐?”

침을 삼켰다. 그럼 어떻게?

“선물을 줄게.”

왜? 복권번호라도 알려주게? 아니면 우승하는 경마 번호라도? 아냐, 됐어. 그런 건 사양할게. 어차피 난 복권을 사러 나가지도 못하고 경마장은 더더욱 그렇지. 주식이라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고. 아, 우리 삼촌이 주식 때문에 자살한 건 알고 있지. 게다가 돈 문제가 아니라고 난.

“그런 게 아냐.”

그럼 뭔데? 뭔가 감동적인 말? 네 목숨을 소중히 하고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그거야말로 진짜 꿈 같은 얘기네.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깐.”

하는 말과 함께 내 발 밑에 툭, 하고 걸린 것은,

총.

아, 이건······.

기억난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건 ‘나를 죽이는 총’이야.”

뭐야, 진짜 있는 거였어?

“그래. 아까 잠깐 연습하는 걸 보니 잘할 것 같던데?”

아.

“죽고 싶지?”

침묵.

“자살은 싫지만 죽고는 싶고. 어떻게 죽어야 되는지 언제 죽어야 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어디서 죽어야 할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네, 아무튼 그 선택들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지? 그런 선택을 쉽게 할 정도라면 지금 이 지경은 아니겠지. 아니, 어쩌면 정말 죽고 싶은 건지도 확신이 가지 않고. 또 그런 자신이 더 싫어지고. 죽고 싶은 기억이랑 살기 싫은 이유들은 가득한 데 죽어야 할 확신은 없고, 그렇잖아? 이건 달라. 이건 총, 아니 총보다도 확실하고 깨끗하게 널 죽일 수 있어. 그러니까 이거야말로 확실한, 선택인거지.”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이번엔 바지춤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난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기도 전에 어느새 손에 얹힌 물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총알이다. 매끈하고 윤기가 나는 그것들이 그리는 직선과 곡선을 바라보았다. 아, 이건.

정말이다,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이건 너를 쏠 수 있는 총이야. 음, 말이 좀 이상한가. 그러니까 너를 쏜다고 해서 진짜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잠깐의 뜸.

“네가 죽이고 싶은 너만 죽일 수 있는 총이지. 그러니까 너에겐 완벽한 총이야. 물론 이게 뭐 ‘게으른 나’, ‘무기력한 나’ 이런 놈들한테 한 방씩 먹일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렇게 된 계기를 죽일 수 있다는 거야. 물론 네가 잘 떠올려야겠지만.”

무슨 소린지 알아 들어.

“이해가 빠르네. 단순하게 뭐, 17살의 나, 이런 걸 죽일 수 있는 건 아니고 구체적으로 기억을 떠올려야 해. 어떤 상황을 떠올리고 그 상황속의 너를 죽이는 거지. 이런 총이니까 어디 건물 위나 안이나 아니면 차 안이나 잘 숨어서 쏘고, 기억 속이니까 그런 건 네가 대충 생각해 버려. 네가 그렇다고 믿으면 되는 거니까. 너 같은 방구석 폐인한테 어디 옥상 같은 데서 총을 쏘는 건 꿈 속에서라도 무리겠지? 그러면 이 방 자체를 끌고 다닐 수도 있는 거야. 이해하겠지?”

아. 친절하네.

“미안, 잠깐 웃었네. 아무튼. 총알은 네 손에 있는 세 발이 전부고.”

왜 세 발이지?

“일종의 규칙 같은 거야. 아, 그리고 무조건 마지막 총알로는 이 꿈을 꾸고 있는 너를 쏴. 이 꿈이 기억에 남는다면 넌 완전히 ‘죽고 싶은 나’를 죽인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총알은 두 발이지. 좀 적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이 것도 많은 거지, 사실. 아마 너도 깨닫겠지만.”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빛이 눈을 찡긋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아,

하고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비볐다. 여전히 어둡다. 힘주어 눈을 비비자 눈꺼풀 안쪽으로 청록색과 섞인 붉은 색이 번진다. 배고프다. 엄마, 엄마! 에이 씨발. 대답도 안하네.

방문을 살짝 열었다. 씨발. 아무것도 없다. 원래 밥 놓고 문을 두드리기로 했는데 자는 바람에 못 들었나보다. 에이, 배고픈데. 씨발, 하고 일부러 소리를 질렀다. 그때 안방 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흑, 흑, 흑, 흑

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

처음엔, 또 우나? 씨발. 하는 생각이었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자 무서워졌다. 다시 방문을 닫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깐 게임을 하고 나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잤는데 왜 또 졸리지? 이번엔 밝아질 때까지 잠들고 싶다. 자기 전에는 그냥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꿈이 없는 잠이었다.

아. 자기 전에 잠깐 아까 들었던 소리를 생각했다. 왠지 그게 흐느끼는 소리가 아니라,

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

웃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3. 파 세 뿌리

머리가 아팠다. 밝다. 창밖을 바라보려는데 짜증나게 밝아서 다시 블라인드를 내렸다. 몇 시지? 12시가 좀 넘었나? 배가 고프다. 어제도 씨발, 밥 두 끼나 굶었는데. 방문을 여니 밥이랑 국, 반찬 두어 가지가 쟁반에 놓여 있다. 개미귀신이 개미를 끌고 들어 가는 것처럼,

내 굴속에서 밥을 먹어 치운다. 그리고 껍질을 집어 던지는 개미귀신처럼

다 먹은 것들을 방 바깥에 둔다. 그리고 쾅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컴퓨터를 킨다. 의자를 끌어 당기는 순간, 새끼발가락에 무언가 단단한 게 닿은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내가 책상 밑을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물건이 놓여 있지 않았다면 위에서 말한 내 꿈은 그냥 잊혀졌을 것이다. 그냥, 개꿈. 내게 무언가를 말해대던 빛은 ‘개’인 셈으로 생각했겠지. 며칠 후 아무런 기억도 없이, 나는 다시 뜨거운 방바닥에 누워 나를 죽이는 망상을 해댔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꿈을 잊어 버리는 순간 이 총 역시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확실히 이렇게 믿는 이유는,

바로 그 총을 보는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달그락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꺼내보지 않아도, 손 안에 있는 것처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 이건.

황동색의 미끈한, 손가락 한 마디만한 길쭉한, 총알, 총알이.

세 개가 들어있었다.


4. 만화책의

씨발,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TV에서 나오는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인터넷으로 비슷한 것들을 검색해보아도 나오질 않는다. 그러면 무슨 교화프로그램? 엄마가 또 돈이라도 써대는 건가. 만일 이게 무슨 복지관이나 프로그램에서 나온 거라면, 하지만 그런 것 치곤 총과 총알이라니. 너무 과하잖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버려버리면 되는 일이다. 버려버리고 다시 게임이나 하고 채팅이나 하고 거지같은 사이트들이나 돌아 다니다가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면 되는 일이다. 물론 난 이딴 걸 버리러 밖에 나가지는 못하지만, 쓰레기통에 담아 아니면 그냥 방 밖으로 내던지면 되는 일이다. 과자 봉지나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속옷이나 휴지 뭉치, 또는 생리대처럼. 그러면 엄마가 알아서 하겠지. 여느 때처럼 흑흑거리는 뭐 같은 소리를 내면서 방 앞을 서성이고 조용해질 때 쯤에 방 문 앞을 내다보면 깨끗해져 있는 거다. 씨발, 만일 그랬다가 저녁밥이랑 같이 방 밖에 둔다던가 하면 엄마가 한 게 틀림없는 거고.

하지만 엄마가 아무리 미쳐도 내 방 안에다 몰래 총을 넣어둘까?

그리고 그 꿈은 아무래도,

그런 ‘이성’적인 판단 밑에서 꿈틀거리는 호기심 역시 어쩔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한 번 총을 만져보았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찌고 더운 방 안에서도 총은 서늘한 제 몸뚱이를 뽐내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하도 많이 주물럭거려서 땀투성이가 되어버린 총알들과는 다르게 검은 맵시를 뽐내는 총을 바라볼 때마다 도무지 어떤 프로그램일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확신처럼 이건 나에게만 일어난 괴현상일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손에 들었을 때 쇳덩이가 주는 무게, 노리쇠를 당기면 들리는 쇳소리가 여태까지 들었던 어떤 소리보다도 더욱 믿음직한 음성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난,

병신같이 내가 지워야 할 기억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빛’이 말한 대로라면 내가 죽고 싶은 기억을 생각해야겠지만 찝찝했다. 그 말을 듣기도,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또 다시 그 빛이란 놈이 나타나서 날 놀려댄다면. 내가 떠올린 그 기억을 끊임없이 외쳐댄다면, 난 내 방에서도 쫓겨나는 거야.

그때 내 눈 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만화책 전집 13권이었다.

고등학교 때 산 만화책. 중학교 때 봤던 건데, 진짜 재밌어서 고등학교 때 완결 날 때까지 다 사서 본거 아냐. 아, 저거 볼 때 진짜 재밌었는데. 저거 맨 처음에 볼 때 어땠더라? 반전 진짜 끝내줬잖아. 여주인공이랑, 그리고 남주인공이랑.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진짜면 만화책 한 번 더 재밌게 보면 되는 거고, 가짜면 그냥 별거 아니잖아? 어차피 만화책 내용인데. 그리고 확인해 봐야 되니까,

구석에 굴러다니는 노트 한 장을 펼쳤다. 잔뜩 자살에 대해서 쓰여 있고 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앞 페이지를 정신없이 넘겼다. 이제 보니 우습고 유치한 내용들. 저 딴것들을 쓰고 그리면서 또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라도 냈겠지. 정신 차려, 병신아 거울이라도 봐. 네가 무슨 판타지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아?

뭐, 지금이라고 별 다른 걸 하는 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선 총에 대해서 적고,

만화책의 내용을 적었다. 그 반전이랑 기타 등등의 대사들도.

그리고 노트의 앞면에 크게 ‘자살방지노트’라고 적는다. 누가 시킨 것처럼,

총에 왼손을 올려놓는다. 이상하게 서늘한 느낌이 왼손을 타고 몸의 반면을 잔뜩 휘어 감는 느낌이다. 눈을 감는다. 어쩐지 잠들기 힘들 것 같지만,

가장 죽이고 싶은 건 ‘저 만화책 1권을 보던 나’.


5. 반전

13권의 마지막장을 덮는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펼쳐본다. 다시 13권을 바라본다.

이게 뭐야. 이건.

이거야말로, 반전이잖아.


4. 파 두 뿌리

죽고 싶은 기억, 을 생각해본다. 쥐구멍을 넘어서 쥐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었던 기억, 그 기억속의 ‘나’야말로 바로 ‘죽고 싶은 나’이고 그 ‘죽고 싶은 나’를 생각하는 ‘내가 죽이고 싶은 나’가 아닐까.

누구나 후회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회와 죽고 싶은 기억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후회스러운 기억 속에서 나는 행동의 주체이지만 죽고 싶은 기억 속의 나는 행동의 객체라고 할까? 사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도 그 자리에서 검은 피를 죽 뱉으며 죽어 넘어져도 아무도 몰랐을 텐데, 하는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왕따’라거나, 그런 기억들 속에서,

죽이고 싶은 나는 살고 싶은 나 사이에 조각조각 엉켜 있다.

내 책상 주변의 아이들 필통 안에는 연필이 들어있다. 수업시간동안 사방에서 연필 깎는 소리가 들린다. 수업이 끝나고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내 목 뒤에는 나무가루와 흑연가루가 들이 부어진다. 아이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흑연덩어리와 뭉쳐져서 땀구멍을 막는다. 마치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에얼리언이다, 씨발년. 진짜 존나 못생겼네.

누가 외친다. 그 외침 한 마디가 적군이 쏜 첫 번째 화살이 되어 날 파고든다. 뒤이어 화살들이 쏟아진다. 핏, 퓻, 하는 소리, 가 뱅글뱅글 돌면서 날 갈가리, 찢는다. 핏, 퓻, 따뜻한 것이 뺨에 닿는다. 누가 침을 뱉었나 보다.

흑연이 내 몸 안으로 스며든다. 난 검고 윤기 없는 하나의 돌덩이가 된다. 단단하지도 않은.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고, 작은 날과 가루로 변해 부서진다. 바람이 불고 흩날려진다. 그렇지만 절대 흩날려지지 않는 기억.

차가운 느낌, 목덜미를 타고 얼굴을 타고 흐르는 느낌. 누군가 머리에 음료수를 붓는다. 머리를 털 수도 없다. 어느 녀석이 닦아준답시고 걸레를 던진다. 걸레는 제 몸을 펼쳐 내 시야를 가리고 내 얼굴을 덮는다. 눈꺼풀이 내 눈을 덮는다. 세상은 검은 흔적과 역겨운 냄새만 남는다. 누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들고. 콧잔등이 찡한 그 순간 날 구하기 위해 세상은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다행히.

하지만 정말 난 외계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렌지색과 향이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신.

아이들이 끼룩 끼룩 웃어대며 자리에 앉고.

난 백사장의 갈매기처럼 구경거리가 되어 자리에 앉는다. 마치 석유가 유출된 해안의 물새처럼 끈적끈적하고 어두운 것이 잔뜩 몸에 묻어 결코 날 수도 헤엄칠 수도 그래서 도망갈 수도 없는 기억. 애써 태연한 척을 해도 사람들이 카메라 렌즈 사이로 날 동정하는 기억. (그렇지만 가엾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저 씨발 새끼들이 석유를 유출시킨 새끼들이란 걸 난 알고 있다.)

노트에 기억을 적었다. 죽고 싶은 순간, 그러니까 죽이고 싶은 순간을. 눈에서 끈적끈적하고 뜨끈한 기름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더럽다, 는 생각이 들어 얼른 바지에 문대 닦았다. 다시 눈을 끔적여 더러운 것들을 마저 밀어내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친다.

뜨거워진 컴퓨터를 끄고.

내 자신의 전원을 끈다.

뜨거웠던 이마가 천천히 식기 시작한다.


5. 다시 기억

깨어났을 때는 해가 지기 전의 저녁이었고, 오렌지 색 빛이 가득 벽지를 물들이고 있다. 왠지 볼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싸쥐고 잠깐 동안 있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천천히 얼굴에 스며들 때까지 있었다. 한참 후 손바닥을 때고 다시 내 눈에 천장무늬가 보일 때까지 누워 있고 난 후에야 나는 밥을 먹으러 방문으로 향했다.

식은 오뎅국. 흑미가 섞인 밥. 어묵조림과 총각김치.

를 우적우적 씹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리에서 작은 조각들이 끊임없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다. 다시 눈가를 비볐다. 발갛게 달아올라 부운 눈자위를 껌벅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에서 거북한 숨이 올라왔다. 다시 한 번 숨을 고쳐 쉬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총소리와.

그리고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과 축축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노트를 펼쳤다. 한 자 한 자 내 글씨체로 적혀져있는 내 기억을 마치 소설을 읽듯이, 무서운 이야기를 읽듯이 읽었다. 씨발 년이, 죽어도 싼 년이 부들부들 떨며 공책 안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정말 글자들이 발자국처럼 흐려진다. 눈물이 다시 눈가에 고이고 한 방울 두 방울 씩 떨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슬픈 건지 어째서 우는 건지도 모르고 다시 생기는 눈물자국을 비벼야 했다.

그 때, 주머니에 무언가가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든다. 손을 넣는다. 숨을 몰아쉰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닿는 매끈매끈하고 단단한 물건, 한 개.

이제 이 모든 걸 끝내야하는 마지막

한 발.


6. 파 한 뿌리와

죽고 싶은 기억들이 아우성치며 목구멍을 치고 밀려 올라온다. 저마다 절규하고 얼굴을 쥐어뜯는다. 지옥의 영혼들에게 천사가 내민 파 한 뿌리의 이야기 속처럼, 귀신들이 내미는 손가락들이 지옥을 가득 메운다. 나는 고백하지도 못했던 그 남자애, 그 남자애를 좋아했던 다른 여자애들이 그 남자애와 떠들고, 그리고 졸지에 반에 내 소문이 터지고, 나를 쳐다보던 그 남자애의 얼굴. 심지어 다른 남자애와 싸우기까지 했던,

씨발 저 년 갖고 나한테 지랄 좀 하지 말라고.

수없이 우유가 부어지던 내 체육복과 서랍, 그리고 나에게 심부름 시키는 걸 은총처럼 생각하던 그 ‘년’들. 수학여행 날, 그 지옥 같은 이틀 밤. 내가 나오지 않는 단체사진. 교무실에 다녀와서 울던 엄마.

왜 우는데, 왜 우는데, 왜 우는데, 제발 말 좀 하라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던 재수학원.

수학여행과 다를 바 없던 신입생 OT날과 정말 날 외계인처럼 바라보던 동기 남자애들과 선배들. 그리고 여자 동기들. 여전히 날 가지고 씹고 물어뜯고 돌리던 그 입과 이빨과 혀들. 화살과 면도칼 같은 것들과 묵직한 둔기 같은 것들. 수없이 바라 본 거울에 비친 나를 닮은 모습 같은 것과,

대학교 3학년, 과제를 하다 늦은 그날 밤, 그 골목길에서, 그 것이, 날 붙잡고, 난 발버둥치고, 그리고 그 게 하던 말,

가만있어, 썅년아. 못생긴 년이 어차피 너도 좋잖아.

그리고. 씨발, 나도 너 같은 거 랑 하기 싫으니까 가만있으라고. 죽여 버리기 전에.

병원에 다녀오고, 날 바라보던 그 의사의 진물 같은 눈동자와.

그리고 세상이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현관 문 너머의 모든 세상이 내게 긴 혀를 내밀고 그 진물같이 누런 눈동자와 부리와 화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바라본 세상은 오렌지 향 나는 음료수로 가득 차 있었고 어느 날은 흑연 가루같이 검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도 꾹 참고 학교를 가야 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하늘이

가만있어, 썅년아, 못생긴 년이, 어차피 너도 좋잖아,

그리고

씨발, 나도 너 같은 거 랑 하기 싫으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죽여 버리기 전에,

라고 말하던 순간, 난 더 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휴학이나 자퇴 같은 것도 하지 못 한 채 이 방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오렌지 빛 세상이 중얼거리는 누런 말들 때문에.

눈에선 오렌지 향과 색을 닮은, 외계인의 눈물이 아까부터 누런 자국을 남기며 흘러내리고 있다. 다시 내 손이 하나뿐인 그 총알을 다시 쥐었다. 하나론 안돼, 안돼,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왜 만화책 같은 거 때문에 총알을 날린 거야, 무슨 짓을 한거야, 이대론 안돼, 많아야 돼, 총알이, 그런데 나, 엄마, 내가 무슨 짓 한거야? 엄마, 다시 되돌려야 돼, 엄마, 엄마.

홋홋홋홋홋홋홋홋홋홋.

엄마.

엄마?

홋홋홋홋홋홋홋홋홋홋.

엄마, 나 누가 죽이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런데 총알이 하나야, 어떻게 해야돼?

홋홋홋홋홋홋홋홋홋홋.

홋, 홋, 홋.

엄마.

엄마?

엄마, 맞아?

무서워, 어두워. 여기는 어디지?

어디선가 떨리는 흰 손이 보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무언가를 내민다. 나도 모르게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사람처럼 불쑥 그 것을 잡는다. 천천히 그 것이 날 끌고 올라간다. 엄마, 엄마야?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본다. 검은 윤기가 나는 긴, 아, 이건.

순간,


7. 소원 하나

밝아, 밝아. 왜 밝지? 눈을 떴다.

아.

여긴 집 밖이잖아. 아, 내가 왜 밖에서 잠을 자고 있지.

아,

떨리는 다리를 추스린다. 주위를 둘러본다. 창 밖으로 가끔 내다보던 앞집의 회색 담벼락과 검은 자동차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나머지 풍경은 흐릿하게 보인다. 눈을 비비며 재빨리 우리집 대문으로 다리를 끌며 걸어가다,

넘어진다. 아, 씨발, 또 뭐야. 이건.

총?

검고 길쭉하게 뻗은 총신. 또렷하게 뜨고 있는 외눈박이 스코프. 그리고 내게 약속해 주듯이 둥글게 손가락을 말고 있는 방아쇠. 떨리는 손이 총을 든다. 무거워, 하지만 누가 시키는 것처럼 난 덜덜 떨면서 집으로 들어간다. 대문은 열려 있어, 마당을 지나서, 몸으로 문을 밀고 들어간다. 맨발이었네, 아 엄마가 싫어하겠다. 근데 이미 누가 지나갔어. 마루에 잔뜩 찍혀있는 하얀색 흙발자국. 이건.

내 발자국이랑 똑같잖아,

똑같아서 난 재빨리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숨이 차다. 총이 덜걱거리면서 흔들린다. 심장이랑 같이, 총이 들뛴다. 그리고 숨을 고른다. 내 방문이 열려 있다. 그 순간,

탕.

집안이 뒤흔들리는 소리,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내가 뛰고 있다 사실도 모른 채, 복도를 달려 방문을 걷어찼다. 방 안에는 만화책을 들고 검은 피를 쭉 쭉, 내뱉으며 널브러져 있는 나와, 총을 들고 멍하니 있는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 멍하니, 그리고 난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내게 말한다.

내가 하지 말자 그랬잖아, 썅년아.

탕.

몸을 뒤흔드는 충격, 아니 총격. 어깨뼈가 빠지는 듯이 거세게 총이 날 후려치는 반동과 어깨뼈와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물감. 뱅글뱅글 끊임없이 도는 큰 송곳 같은 것이 날 헤집고 들어오는 느낌. 끝없이 감기는 눈꺼풀.

희미하게 보이는 방바닥엔 잔뜩 번져 있는 내 피.

오렌지 향인.

내 피.

근데, 왜 오렌지 향인거지?


8. 희망

머리가 아프다.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른다. 어지러워서 왼손으로 바닥을 집고 일어나려하는 순간, 어깨를 찌르는 고통이 느껴져 그만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아, 뭐야. 이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아, 머리야. 그리고 어깨랑.

헉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순간 지독한 오렌지 냄새가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욱하고 안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화학약품 냄새처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오렌지 냄새에 결국 난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고야 말았다. 눈앞이 멍해지면서 입에서 늘어지는 침이 방바닥에 닿는 것을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자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저 원래 방 안을 메우고 있던 퀴퀴한 냄새 뿐. 그러고 나자 왜 내가 오렌지 냄새에 역한 것을 느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오렌지 냄새가 갑자기 방 안에서 난 건지도. 엄마가 이상한 방향제라도 뿌린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게 뭐야. 이건 웬 만화책? 엄마가 빌려 온 건가?

노트? 이건 또 왜 여기 나와 있어? 자살방지노트라니, 이게 뭐야, 유치하게.


9. 두 번째 구원

노트를 덮는 소리.

그리고 한숨 소리. 아니 헛웃음 소리? 갑자기 기억들이 머리 안에 빼곡히 적히는 작은 글자처럼 적혀간다. 그리고 난 그 글자들이 적히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 글자들을 지우는 지우개를 손에 쥔다. 미친 듯이 박박 문댄다. 지우고 지운다.

총을 손에 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내 손안에 있는 건 총알 두 개.

그리고.

끝이 없는 벼랑을 향해 끝없이 늘어진 탄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총알들이 황금같이 환한 빛을 뿌리며 있었다. 끝이 없는 어둠을 향해.


9. 천사

파 한 뿌리에 매달리던 죄인들의 이야기. 누구 하나가 가장 먼저 매달리고 다른 이들은 저마다 그 죄인의 팔다리에 매달린다. 천사가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한다. 파 한 뿌리가 흔들흔들 흔들린다. 매달린 죄인들은 저마다 불안감을 느낀다. 누구 한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린다. 순간 욕지기와 저주와 비명소리가 지옥을 메운다. 서로의 손아귀가 서로를 잡아챈다. 끝이 없는 무저갱에서 결국 한 사람만이 영광의 그 파 한 뿌리에 매달린다. 안도감을 느낀 그는 천사를 올려다본다.

천사의 고운 미소와 금발 머리, 뽀얀 피부를 보는 것만으로 그는 이미 천국에 닿은 것처럼 행복감을 느낀다. 천사의 맵시 있는 날개가 펄럭이며 천국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그는 이미 천국의 은총을 느낀다. 무한한 신의 은혜에 감사한다. 그리고 눈을 뜬다. 어, 여긴 아까 거기 아뇨? 의아하게 느끼며 다시 천사를 바라본다.

고운 미소와 금발 머리, 뽀얀 피부와 맵시 있는 날개.

그리고 흰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작은 꼬리.

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킬,

아니,

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훗,

끝없는 추락, 주위에는 날 바라보는 죄인들의 증오스런 눈빛. 그들의 우악스런 손길이 다가온다. 아, 아, 아. 여긴 지옥, 끝이 없는 무저갱.

하며 꿈에 깨어난다.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희미하던 것들이 눈꺼풀 사이로 밀려들어가고 세상은 또렷한 천장만을 남기며 나를 바라본다. 아, 하고 기지개를 편다.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브러진 옷들과 속옷들, 에이, 이게 뭐야. 방이 왜 이렇게 더러워. 엄마, 엄마는 어디 계시지? 하던 나는 시계를 보고서야 아, 벌써 출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방안의 공기가 조금 답답하다. 창문을 연다.

햇빛과 바람과 새소리와 아이들 웃는 소리 같이 시원하고 신선하고 상쾌한 것들이 방금 내가 연 직사각형의 공간으로 쏟아들어져 온다. 까르륵 웃으며.

나도 잠깐 미소를 지었다.

아, 좋다. 순간 마음속에 무언가 찝찝한 게 있다는 걸 생각한다. 왜 이러지? 아마, 악몽 때문인가. 무슨 꿈이었지, 하고 잠깐 곰곰이 생각한다. 하지만 떠올릴 수 없다. 별거 아니겠지 뭐. 어차피 다 잊어 버렸잖아.

다시 기지개를 편다. 그리고 입은 옷을 바라본다. 무슨 국물 같은 것들이 잔뜩 묻어 얼룩덜룩 하다. 에이, 이게 뭐야. 어차피 방안에 있긴 하지만. 아, 근데 왜 내가 방안에만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오늘은 바깥으로 나가보고 싶기도 하다. 다시 창 밖을 본다. 시원한 것들이 떼굴떼굴 굴러들어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다시 웃음이 난다. 아,

좋다.

그래, 옷이나 갈아 입을까. 옷장 문을 열고.

어.

어?

옷장 문 한 켠 에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옷장 문짝만한 은빛 공간과

그리고 어떤 것이 그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10. 죽이고 싶은

저게 날 노려본다. 뭐지? 저건? 대체 왜 저렇게 생긴 거야. 왜 저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저 것 때문에 아침에 좋았던 기분을 다 잡쳤어. 방안에 토해버렸잖아. 아직도 저걸 보면 헛구역질이나. 뭐야. 저건.

죽여 버리고 싶어. 저거 때문에 아까 좋았던 기분 진짜 다 망해버렸잖아. 거지같아. 저 새끼 좀 봐. 아까부터 나 째려보면서 나 따라하고 있어. 진짜 뭐하는 거야. 썅년아, 어? 저 새끼 입 모양이, 너 지금 나한테 욕하는 거야? 너 제정신이야?

미쳤나보네. 저 년이?


11. 년

엄마, 엄마가 생각하면 나 미친 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어. 몰라, 엄마. 이제 겨우 1시 좀 지났으니까 엄마 돌아오려면 아직 6시간이나 남은 거지? 근데 나 못 기다리겠어, 엄마. 나 지금 너무 엄마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이제 이것만 하고 엄마 직장으로 갈 거야. 도중에 전화할지도 몰라. 짜증날지 몰라도 전화 꼭 받고, 엄마.

보이지? 천장에 박힌 못이랑, 그리고 내 목에 감고 있는 줄이랑. 그리고 엄마, 저 년 좀 봐. 저년도 저 안에서 똑같이 목매달고 날 바라보고 있는 거. 독한 년. 아까 내가 그렇게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듣는 거 있지. 엄마, 나 저년 너무 죽이고 싶어. 저년 저기서 저렇게 나 따라하고 있는 거만 봐도 너무 죽이고 싶어. 그래서 지금 나 이 의자 위에 있는 거야. 저 년 좀 봐봐. 내가 이렇게 하는 척만 하고 내려올 줄 알고 저기 서 있는 거. 근데 난 진짜 찰 거야. 그럼 저 년도 진짜 차겠지? 그럼 저년 저기서 뒈지는 거만 보고,

엄마, 나 지금 엄마 너무 보고 싶어. 나 아까도 엄마 너무 보고 싶어서 울었다, 엄마? 엄마,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 저 년 뒈지는 것만 보고 바로 갈게. 엄마, 우리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 나 중학교 때만해도 나 가끔 엄마 직장 가서 저녁 얻어먹고 그랬잖아. 꼭 맛있는 거 아니어도 되니까, 엄마 사내식당에서 먹어도 되니까 진짜, 오늘 엄마, 우리 오늘 저녁 꼭 같이 붙어 있자. 응, 알았지? 엄마?

그럼 이따 봐요. 저것 봐. 저 년이 나 째려보면서 우는 거. 진짜 못 보겠다. 얼른 해야겠어.

엄마, 사랑해요.


12. 자살방지노트

현재 모친(000, 52)은 의식을 잃고 모 병원 응급실에 있음. 모친은 귀가 후 딸의 방에서 목을 매단 000(24)를 발견,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음. 이웃 주민 000(49)씨가 모친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내려와 열려 있는 문을 보고 들어왔다가 목을 매단 000(24)와 의식을 잃은 모친을 보고 신고.

000(24)의 방에는 ‘자살방지노트’라는 노트에 여태까지 000(24)가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들이 자필로 적혀있음. 열린 옷장의 거울을 보며 자살한 것으로 파악. 유서는 남기지 않았음.

특이점: 000(24)의 주머니에서 총알로 보이는 물건 세 개 발견. 해당 물건에 대한 국과수 의뢰. 그러나 방 안에서 총기로 보이는 물건은 보이지 않음. 자살자의 주머니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무슨 의미가 있는 물건으로 보임. 모친이 의식을 찾는 대로 물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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