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야담』 - 천인과의 만남 편

풀벌레의 노래를 위하여

by 엽서시

『해동야담』을 읽는데 자못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이 글은 허무맹랑한 소설로 보이나, 이 글에 나오는 천인(天人)이라는 사람은 마치 요새 말하는 외계인과 흡사하다.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경자년(庚子年) 어느 날 나는 스스로 하늘에서 왔다고 하는 천인(天人)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천인은 은을 두드려 다듬은 것과 같은 옷을 입고 또 구슬처럼 둥글고 유리처럼 투명한 통을 쓰고 있었는데 그 통 안에는 주름이 없는 마치 잔나비와 같은 얼굴이 있었다. 천인은 빛을 내며 하늘을 나는 수레를 타고 다니는데, 수레를 끄는 우마(牛馬)가 없어도 저절로 뜨고 내려앉으니 귀신도 놀랄 노릇이다.

이 수레가 뜨고 내려앉는 광경을 밤에 멀리서 보면 마치 별이 내려앉는 것처럼 보이는데, 올 여름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관측한 혜성은 바로 이 천인이 타고 온 것이다. 천인은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였는데, 내게 몇 가지 부탁을 하였다. 하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고 또 익히고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나도 천인의 삶에 호기심이 들어 서로 묻고 답하니 어느덧 새벽닭이 울어 동 틀 녘이 되었다.

천인이 닭 우는 소리에 놀라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고 내가 웃으며,

“계(鷄) 공이 아침을 알리는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천인도 그제야 함께 웃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 땅의 관리들은 위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임금의 뜻을 살피며, 아래로 백성을 굽어 살피는 사람이라 하였소. 하룻밤 문답이지만 내 생각에 공은 앎이 깊고 어진 사람인데 어찌 관리를 하지 않으시오?”

하고 천인이 묻기에,

“앎과 어짊은 배우고 궁리하여 얻을 수 있으나, 나라의 관리가 되기 위해선 돈과 가문이 필요하지요. 돈과 가문은 배우고 궁리한들 얻을 수 없으니 나는 관리가 되지 못할 팔자요.”

하고 답하였더니 천인이 다시 웃었다.

천인이 비로소 떠날 뜻을 밝혀 함께 맞절을 하며 송별의 인사를 하였다. 이때 천인이 나를 돌아보는 데 얼굴에는 야릇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천인이 내게 말하기를,

“내 이 땅에 사는 이들이 어찌 먹고 입으며 무엇을 말하고 배우는지를 알고자 큰 계획을 품고 찾아왔는데 오늘 김 공이 도움을 주어 고맙기 그지없소. 내 김 생에게 큰 보답을 하고 싶으나, 하늘의 법이 지엄하여 금(禁)하는 것이 많아 한스럽소. 그러나 내 김 공의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고자 하니, 혹 김 공이 살며 궁금하던 것 중 작은 것이 있거든 물어보시오. 내 답하겠소.”

하였다. 내가 이에 웃으며,

“옛 이야기를 보면 천인(天人)들이 지상에 내려오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허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노형(老兄)은 겨우 부탁 하나를 들어준다 하니 과연 옛 이야기들은 전부 허무맹랑한 것입니다그려.”

말하니 천인도 함께 웃었다. 이때 문득 뜰에 귀뚜라미(원문에 ‘蟀’로 나타나 있다.)들이 울었다. 일전에 나는 박 생과 홍 생과 함께 시를 지으며 놓았는데, 이때 귀뚜라미의 울음에 대하여 농을 나눈 일이 있었다. 귀뚜라미가 우는 것은 짝을 찾고자 함인데 그 노래의 내용이 매양 같으니, 나는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것은 “여(女)”를 거듭하는 일이요, “여자(女子), 여자, 여자.”하고 부르는 일이라 하였다. 이때 박은, 귀뚜라미는 미물이요, 미물은 본디 금(禁)하는 일이 없고 거침이 없으니, “교합(交合), 교합, 교합.”하고 부르는 일일 거라 하며 웃었다. 그러자 홍은 귀뚜라미는 제 짝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노래를 하는 것이니, “오라, 오라, 오라.”하고 말하는 일일 것이라 하였다.

이 일이 생각나 내가 천인에게 웃으며,

“저 뜰에 귀뚜라미들이 우는 일이 전부터 성가셨는데, 내 늘 저 뜻이 궁금하였습니다. 하늘의 법도에 금하지 않아 노형이 저 노래의 뜻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곧 그 뜻을 풀어 해설하니 아래와 같다.


더듬이로 땅을 두드리고 날개로 다리를 치며 부르노라.

부르노라.

그대여.

저 하늘의 별이 내 겹눈보다 수가 많은가.

나는 대답할 수 없네.

흙 위를 벗어나 솟구치는 마음은 대체 무엇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네.

보지도 못한 그대는 어떻게 내 노래의 주인이 되었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네.

흙을 뚫고 자란 저 풀은, 풀잎이 먼저인가, 줄기가 먼저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네.

이 노래로 밤을 태우고 나면 그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네.

흙에 온기가 식을 때까지 한 달 남짓한 내 삶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나는 대답할 수 있네.

그대여.

부르노라,

더듬이로 땅을 두드리고 날개로 다리를 치며 오직 부르노라.


이후 천인은 붓의 막대기 같이 생긴 물건을 꺼내 내게 보였는데, 그 물건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가 어찔하여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방 안의 천인과 마당의 수레는 이미 간 곳이 없고 다만 방에는 천인과 마신 술잔만이 구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천인을 만나 천인과 수작한 것과, 천인이 알려준 귀뚜라미의 노래는 기억에 남으나 천인이 말한 하늘의 생활은 전혀 기억에 없으니 이는 괴이한 일이다.

나는 전부터 귀뚜라미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하기를 내가 그 뜻을 알지 못하나 필시 조악하고 거친 노래일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 나니 비록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이나 그 뜻이 절실하고 운을 맞추었으니 놀랍다.

진실로 내가 알지 못하며 업신여기던 것이 이뿐이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내 속으로 짐작하고 귀와 눈을 닫은 것이 이뿐이랴. 옛사람들이 매화와 난초, 국화와 대나무뿐 아니라 초충(草蟲)을 그리는 까닭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생각하여보니 초충에도 담긴 그윽한 뜻을 알고 붓으로 담아보고자 했음이다. 이 세상에 하늘이 허투루 지어낸 것은 없으니 벌레 한 마리와 구르는 조약돌에도 그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무식하고 단순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짐작하는 일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혹 천인이 나를 희롱(戲弄)한 것일지도 모르나 천인과 만남이 있고 또 배움이 있으니 이 글을 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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