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이별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이별

by 엽서시

합격했어,

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우석은 잠깐, 아주 잠깐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잠깐 숨이 멎는 동안 그는 이른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마등과 같은 것을, 지나간 시간들이 눈 앞에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스물셋, 그러니까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우석은, 2년 동안 대학을 다녔고, 또 휴학 없이 이어서 2년 반 동안 대학원을 다녔다. 일 년 반 동안 고시를 준비했고 이어서 일 년 동안 취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1년 단위 계약직 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녀를, 그러니까, 지연과 연애를 시작한 것이 스물셋이었다. 우석은 아직 머리가 웃자란 복학생이었다. 전공 수업을 듣는 강의실은 의자와 책상이 바뀌어 있었다. 강의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스크린을 보며 그는 차라리 내무반이 더 익숙하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지연도 복학생이었다. 지연은 1년 그리고 또 1년 이렇게 2년 동안 휴학을 했다.

어느 날 같이 과제를 하고 술을 먹고 노래방을 갔다. 노래방에서 지연은 우석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우석은 노래방 기계에서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지연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다.

칠 년이 흘렀다. 우석은 서른이 되었다. 지연은 이제 스물아홉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우석과 지연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 말 한 마디, 우석의 숨을 잠깐 멎게 한 그 한 마디는 그녀의 자리가 변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우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석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둘의 관계가 변했다는 것을.

전화를 끊고 우석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표정이 좋았다.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우석은 혹시 자기의 표정이 달라진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우석에게, 우석 씨, 얼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따위의 질문을 하는 일은 없었다.

금요일에는 6시 정시 퇴근을 하는 것이, 무슨 말마따나 정해져있는 규칙은 아니었지만, 규칙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우석 역시 퇴근을 준비했다. 가방을 메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카드를 찍고 전철을 탔다. 앉을 자리는 없었고 잡을 손잡이도 없었다. 서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석은 흔들거리면서 퇴근을 했다.

퇴근길에 우석은 생각했다. 지연을 축하하고, 지연과 함께 기뻐하는 와중이었다. 지연은, 다르지 않았다. 대학원은 가지 않았으나 조금 더 길게 고시 공부를 했다는 것이 달랐다. 긴 고시 공부 후에 지연은 이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지연이 자신의 결심을 발표하던 날, 우석은 지연을 응원하겠다고 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우석은 맥주를 샀다.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를 살까 하다 어쩐지 술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페트에 담긴 맥주 피처를 집으면서 그는 또 속으로 웃었다. 대학에서, 지연과 함께 얼마나 많이 이 피처를 비우고 쏟고 수선을 떨어 댔었는지.

잠자리에 눕기 전 우석은 지연과 약속을 잡았다. 일요일 두 시, 리노 카페에서 보자. 그 알지? 역 앞에. 응. 그래, 거기서, 보자. 하고 우석은 잠깐 말을 멈췄다. 지연아, 정말 축하해.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너머 지연의 목소리는 시끌벅적한 소란을 깔고 있었다. 남자들 목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 들떠 있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함부로 대하고 다가갈 준비를 마친, 그런 남자의 목소리.

잠자리에 누웠을 때 우석은 두 병의 맥주 피처도 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주기적으로, 그리고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불면증이었고, 불면증과 함께 불안감이 찾아왔다. 시계를 보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지연은 집에 들어갔을까,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지연에게 따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러니 우석은 따로 지연에게 연락을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불안감을 들키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우석은 생각했다.

수화기 너머 남자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웅웅거렸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또렷하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변했다. 문장들은 뭉쳐 시나리오를 만들며 가지를 펼쳤다. 그러다 우석은 그 짓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연을 완벽하게 믿기 때문이냐 하고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위기감은 들지 않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우석은 위기감 자체를 느껴본 지가 정말 오래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위기감은 행동을 이끌어내지만 불안감은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않는다. 위기감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면 불안감은 창문 옆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것이다. 천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느끼고 있는 것이 불안감일 것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다 우석은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뒤척거리다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는 11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아침 아홉 시 쯤 우석이 보낸 답장에 지연은 아직 답이 없었다.

우석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손가락 사이에 감겨 나오는 머리카락을 털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젖은 머리로 라면을 끓였다. 문을 열 때 마다 텁텁한 구취를 풍기는 냉장고에는 세 알의 계란이 남아 있었다. 파는 없었다.

라면을 먹고 믹스 커피를 한 잔 타 먹었을 때까지도 지연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우석은 무언가를 느끼는 중이었다. 감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우석이 느끼고 있는 것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허리띠처럼 국물 자국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냄비를 보다 우석은 어젯밤 떠올렸던 끓는 물 속의 개구리를 다시 생각했다. 그 개구리처럼 자기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석은 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시가 넘었을 때 지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짧은 문자였다. 집에서 진짜 좋아하시겠네, 라는 우석의 말에 지연은 응응.

그게 전부였다. 우석은 다시 슬리퍼를 끌며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맥주 피처 두 병을 잡았다. 봉투 드릴까요, 네, 봉투 주세요, 삑, 바코드 찍는 소리. 봉투에 들린 맥주 두 병을 들고 걷는 길. 일요일 두 시 리노 카페, 둘이 같이 학생이던 시절 많이 찾았던 카페였다. 우석은 혼자 웃기도 하다 다시 입술을 굳게 다물기도 하며 걸었다.

삑,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취방 문을 열었다. 빽빽한 침엽수림에 드리운 그늘처럼, 한 번도 햇볕이 닿지 않은 것처럼 눅눅한 방바닥이 우석을 맞았다. 쩍, 소리를 내며 발바닥에 달라붙어대는 누런 장판을 뿌리치다 우석은 주저앉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봉투에서 떨어져 나온 맥주 두 병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서로 부딪쳐가며 굴러다녔다.

잠깐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우석은 맥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목 안이 끈적하게 말라붙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우석이 병뚜껑을 돌리는 순간, 맥주병은 허연 맥주거품을 맹렬하게 토해냈다. 우석은 다시 뚜껑을 돌려 병을 닫았지만, 이미 쏟아진 거품들은 다시 끈적한 맥주가 되어 방바닥 이 곳 저 곳을 휩쓸며 다니고 있었다.

우석은 말라붙은 채 방구석에 달라붙어 있던 걸레를 찾았다. 걸레를 찾는 데도 한참의 시간이 들었다. 걸레를 빨고, 물기를 짜고, 방바닥의 맥주와, 맥주 위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머리카락 또는 먼지 뭉치 따위를 치웠다. 맥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탄산도 냉기도 빠져나간 맥주가, 밍밍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꼴깍, 꼴깍, 여전히 불이 켜지지 않은 방에 앉아 우석은 미지근한 맥주를 마셨다. 동시에 합격했어, 라는 말과, 남자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와, 꿈인지, 아니면 실제로 본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생생한, 그녀가 남자들과 어울려 깔깔거리는 모습 따위가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리노 커피, 가 다시 떠올랐을 때, 우석은 그 미지근한 맥주를, 반 병 정도 마시고, 거북하게 게트림을 한 번 뱉어내고 있었다.

받아들이자, 불현듯 우석은 이렇게 다짐했다. 문득 그 순간, 우석은 그의 갈비뼈 안에서 그 자신을 간질이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우석은 다시 한 번, 맥주를 마셨다. 가벼워진 맥주 페트병 안에서 경쾌하게 맥주가 찰랑거렸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다짐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사실은 우석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우석은 잠깐이나마 그 질문의 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질문이 우석을 붙잡고 끌고 다녔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큰 차이는 없었다. 우석은 잠시나마 지연을 잊고 온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반지를 살까. 우석은 한참 동안 이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우석의 왼손에는 때글은 도금 반지가 보였다. 반지는 맥주병의 주둥이에 단단한 제 몸을 부비고 있었다. 우석은 이 손가락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이 반지를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양이나 결석처럼, 본래 신체의 일부였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우석은 생각했다.

그러나 반지를 빼려 오른손을 대는 순간, 이상하게 우석의 손에는 힘이 빠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석은, 반지를 살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 둘이 반지를 맞춘 것은 대학교 때의 일이었다. 졸업 전에, 그러니까 우석과 지연이 4학년일 때의 일. 벌써 6년이 지났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을 중얼거리며 우석은 다시 한 번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작고 못생긴 반지 하나 해준 것이 전부였다는 생각이 그를 내리쳤던 것이다. 관자놀이를 세게 맞은 것처럼, 우석은 핑, 하니 눈물이 스미기까지 했다. 닳고 닳은, 손가락 지름만한 금속으로 만든 고리가 목을 졸라매는 기분이었다.

그래, 반지를 하나 해주자. 꿀꺽, 침을 삼키듯 그런 생각을 삼켰다. 헤어지더라도, 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생각이 따라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저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우석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적당한 허기와 취기가 걸음을 재촉했다. 번화가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정류장 근처의 작은 주얼리숍에서 반지를 골랐다. 선물 받으시는 분, 손가락 호수가 어떻게 되세요? 점원이 물었다. 아, 하고 잠깐 우석은 말을 더듬었다가 11호요, 하고 답했다. 개 중에 마음에 드는 것 하나가 있었다. 얼마예요? 하고 우석이 물으니 점원은 37만 원이라 하였다.

한 쌍으로 사면 얼마지, 하고 계산을 하던 우석은 쓰게 웃었다. 이것은 한 쌍을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반지를 사고 포장까지 한 끝에 집으로 오는 길에는 슬그머니 술기운이 가라앉았다. 취기가 가시니 남는 것은 허기였다. 집에 돌아와 우석은 다시 라면 하나를 끓이고, 남은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지연은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지연에게 무언가 연락을 하려던 것을 참았다. 더부룩한 배를 끌고 잠자리에 들며 우석은 내일을 생각하였다.

잠깐, 아주 잠깐은 억울함이 일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만남에 늦곤 했다. 한 번은 기차표를 놓친 일도 있었다. 그 뿐인가. 데이트를 할 때면 우석이 세워낸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우석의 옷차림을 지적하곤 했다. 심지어 우석도 그녀의 옷차림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닌 날에도 그러했다. 고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우석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잦았다. 몇 번은 이유도 없이, 새벽에 전화해 하염없이 울어대기도 했다. 우석은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울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서른이 넘었음에도, 우석이 별 볼 일 없는 직장을 다닌다는 것이, 어쩌면 우석의 잘못인지도 몰랐다. 그러자 또, 이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변명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이별은 그녀의 잘못인가, 싶을 때, 불현듯 그녀가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까르르 웃곤 했다. 별 시답지 않은 것에도 웃곤 했다. 우석은 멍하니, 그녀가 까르르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옛 서랍장에서 찾은 오래된 사진처럼 느껴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잘못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잘못이 없는데도 헤어질 수 있나 싶다가도, 하긴 뭐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지, 하는 생각이 일기도 했다.

어쨌거나 결국 우석에게, 내일 그녀와 이별한다는 것은 자명한 결과로 여겨졌다.

이별한다면 그녀에게 최고의 이별을 해 주어야지.

우석은 또 생각했다. 미련이 남은 것도, 나를 영원히 기억해달라는 무슨 유치한 마음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사귀면서 하루 즘 잘해주는 날이 있고, 그 날이 내일이라는 생각이었다. 누구나 연애를 할 때 있는, 그런 날.

붙잡지도, 애원하지도 말자. 화를 내지도, 거친 말을 하지도 말자.

따위를 생각하며 우석은 잠에 들었다. 취기가 섞인 잠이었다.

일요일에 일어나 우석은 제일 먼저 옷을 골랐다. 옷장에는 걸려 있는 옷보다 쓰러져 구겨진 옷이 더 많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썼는지도 모를 다리미와, 다리미 판을 들고 우석은 옷을 다렸다. 먼저 흰 셔츠를 다렸다. 그 다음에 다린 것은 베이지색의 면바지였다. 지연이 잘 어울릴 거라고 했던 옷이었다. 딱 한 번 밖에 입지 않았던 것이 또 가슴을 스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머리도 만질까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몇 번 머리를 올려 보려 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감았다. 덥수룩한 머리가 눈을 찔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석은 다시 집에 들러 우산을 꺼내 들었다. 버스를 탔다. 버스는 때로는 우석의 마음보다 천천히, 또 때로는 우석의 마음보다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정거장에서 내려 익숙한 골목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리노 커피 앞에서 우석은 울컥 목이 메었다. 카페 앞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두 개비를 연거푸 피우고 우석은 카페에 들어섰다. 입맛이 썼다.

시계의 짧은 시침은 아직도 1과 2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분침은 9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석은 아메리카노 하나를 시켰다. 아이스요? 하고 묻는 점원에게 우석은 네, 라고 답했다.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지연을 기다리는 동안, 우석은, 거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머니의 반지 상자는 불편하도록 허벅지를 짓눌렀다. 몇 번이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진동벨이 울렸다. 커피 한 잔이 나오기까지, 우석은 거진 한 시간은 기다린 기분이었다. 커피를 받으며, 우석은 바닐라 라떼 한 잔을 시키고, 또 진열대를 유심히 보다 까망베르 조각 케이크 하나를 시켰다.

우석은 아직도 취기가 깨지 않은 기분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진동벨이 울렸다. 포크는 몇 개 준비해드릴까요, 점원의 말에 우석은 생기 없이, 두 개요, 라고 답했다. 두 개의 포크가 나란히 놓였다. 갑자기 미련과 복잡한 생각이 일어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우석은 쟁반에 놓인 커피와 케이크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또 다시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우석은 시계를 보았다. 두 시 칠 분. 그리고 초침이 ‘10’을 넘어 ‘11’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을 내려놓고, 우석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어 보았다. 14:06. 시계가 시간이 느리구나. 우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초침이 11에 닿았을 무렵, 오늘도 늦는구나,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짜증은 나지 않았다. 우석은 애써 웃어 보려 했다. 그러나 입술을 벌리고 살짝 찡그렸을 뿐이었다. 한숨도 아닌 날숨이 침 몇 방울과 함께 튀어나왔다.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우석은 고개를 돌렸다. 지연이다. 우산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연의 코트 끝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우석은 일어나려 움찔 몸을 움직였으나 일어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연은 거의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우석의 자리로 걸어왔다. 우석과 지연은 카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7년을 그렇게 약속처럼 카페 가장 구석 자리에, 서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연이 자리에 앉았다. 안녕이라는 말도 없었다. 늦었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우석은 고개를 들었다. 지연은 익숙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낯선 네이비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 샀구나, 하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석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화장을 했구나, 우석은 생각했다. 오랜만이야, 하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석은 잠깐 입을 열었다가 말 대신 한숨도 아닌 날숨을 겨우 내뱉었다. 지연이 맞은편에 앉았다. 제 앞에 놓인 머그컵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손잡이를 감싸 쥐기 전이었다. 그러더니 지연이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우석의 날숨이 무슨 방아쇠라도 된 것 같았다. 지연이 고개를 숙였다. 지연의 몸이 천천히 그리고 점점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연의 어깨가 가파르게 그리고 약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우석은 손을 뻗지 않았다.

손을 들지 못하는 사람처럼, 손을 들 수도 없는 사람처럼, 몸이 굳어버린 것을 우석은 느꼈다. 흐느끼고 있는 지연 앞에서 우석은 겨우 눈을 깜박이고 가끔 입을 벌려가며 숨을 쉬었다. 총에 맞아 천천히 숨을 거두는 사슴처럼 우석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한 땀 씩 힘겹게 이어나가야 했다.

테이블에 눈물이 떨어졌다. 종이 냅킨이라도 가져다주고 싶다고 우석은 생각했다.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벌건 눈이었다. 눈물은 벌건 눈에서 넘쳐 나와 검은 화장 자국과 함께 볼을 타고 얼룩덜룩 얼굴 위를 흐르고 있었다. 지연이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두어 번, 아니면 세 번, 지연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눈물이 흘러 둥근 턱 끝에서 테이블로 떨어졌다. 우석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지연이 핸드백에서 화장지를 꺼내고 그리고 눈을 눌러 눈물을 닦고 잠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우석은 곁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석은 지연이 일어서서, 문으로 걸어가더니, 종이 울리고, 딸랑하고, 종이 문을 때리고, 그 문이 닫히고, 지연이 카페를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잠깐 우석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누렇게 니스를 칠한 나무테이블의 무늬가 잠깐 뿌옇게 번졌다가 다시 선명하게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이 어쩌면 자기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석은 잠깐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빨간 점들과 초록색 빛들이 가라앉고 다시 검은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카페 안의 누구도 우석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말끔했고 눈은 다시 말라 있었다.

테이블 위의 커피는 식어 있었다.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켰다. 커피는 미지근한 것을 넘어 식어 있었다. 사실 우석은 커피의 맛도 커피가 식은 것도 알지 못하였다. 무언가 자신이 팔을 들어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의식할 뿐이었다. 쟁반 위에 빈 머그컵을 놓고 손도 대지 않은 바닐라라떼 한 잔과 조각 케이크 하나를 두고 카운터에 가져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라고 종업원이 말했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때에도 우석은 무언가를 겨우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머니의 반지 상자가 어색하게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석은 느끼지 못했다. 다른, 더 큰 무언가가 우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우석은 이별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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