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Oct 21. 2023

에필로그. N잡러 일기가 된 어두운 밤의 기록들

‘먼 훗날 뒤돌아 볼 때 그대의 소로가 될 테니’

요컨대 지금까지 쓴 이야기는 조금 긴 문장으로 적자면 대략 이런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덕업일치’의 커리어를 걸어갈 뻔했다가, 퇴사 후 이직에 실패해 백수와 다름없는 시기를 보내면서 간신히 ‘이것저것’ 해본 끝에, 영화와 상관없는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우연히 N잡러로 스스로를 포장할 수 있게 된 나날들의 기록.


어떻게든 동일선상의 커리어를 이어가고자 분투했지만 쉬이 그려놓은 청사진처럼 미래가 따라오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뜻하는 것들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삶이었다면 세상 많은 이야기들은 역설적으로 따분하고 단조로웠을 테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 스틸컷


‘망각의 천사’가 실수로 인중에 ‘쉿’ 하고 손을 대는 것을 깜빡한 덕분에 다가올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채로 태어나게 된 주인공 ‘니모’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 노바디>(2009)라는 영화가 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아홉 살 니모가 처음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은 이혼을 결심한 부모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하는 일이다. ‘Chance’라는 이름의 기차역에서 니모는 엄마를 따라갈지 아빠를 따라갈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어떤 선택을 한다. 아니, 선택을 하기 전 각각의 오지 않은 미래들을 미리 살아보는 경험을 한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는 118세의 니모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을 대체 과거의 각 경우의 수들을 회상하는 구조로도 풀이된다. 어느 쪽이든 <미스터 노바디>는 우리가 어떤 순간에서든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며 소설가 김연수의 문장을 떠올린다.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게 삶이로구나.”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242쪽


2020년 11월 '오오극장'에서(좌), 2023년 6월 'gaga77page'에서.

매 순간 다 알 수는 없었으나 그때마다 내릴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인’ 결정과 선택들이 지나고 보면 ‘나쁘지 않은’ 방향일 수 있었음을 깨닫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앞날을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영화에 관해 쓰기’를 멈추지 않은 결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연이 요행이 되어 내게 기회로 찾아오기도 했고 예측불가함이라는 속성이 주어진 일을 놓치 않고 내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성실함을 부여해주기도 했다.


‘N잡러’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게 된 지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영화 마케터 2.5년 차를 지나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 1.5년 차를 거쳐 신약을 개발하는 상장회사에서 IR과 공시, 기획, PR 업무를 3년째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합해도 10년 차를 넘어선 '영화 글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시간의 간격은 따라 잡히지 않을 것이다.


2020년 7월 어느 날 '문학살롱 초고'에서(좌), '관객의취향'에서(우).


그렇게 만들기 위해 개인적인 글이든 청탁 원고든 영화를 보고 리뷰와 비평, 에세이를 쓴다. 여러 자리에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영화에 관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덕질하고 좋아하는 영화들을 생각하다가도 ‘다음 달에 무슨 영화 개봉하지?’ 하면서 검색을 해본다. 다음 날에는 출근을 한다. 얼핏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 일들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내게도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신기나 누구보다 돋보일 수 있는 천재적 재능 같은 건 없다. 다만 하루하루의 생각과 감상, 감정 등을 글의 형태로 기록하기를 제법 오래 지속해 왔고 글쓰기라는 한 분야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매진했다. 취미는 ‘천천히’이고 특기는 ‘꾸준하게’라고 브런치스토리 계정 프로필에 오래전부터 적어놓고 있다. 원하는 걸 전부 이루면서 살 수는 없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조금씩 나날이, 어제보다 더 나은 방향에 가깝게 위치될 수 있도록 오늘을 이끌어줄 수는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이 바로 ‘기록하기’다. 쓰면서 우리는 쓰기 전과 쓰기 후의 사이를 한 걸음씩 딛고 지난 선택들을 끌어안으며 다가올 앞날의 우연들을 성실하게 맞이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하다 보면 개연성 있었을 무언가가 핍진성으로가득한 내 삶의 진실한 커리어가 된다.


2020년 어느 날, (좌측부터) 집 안의 책상과 회사 사무실 자리의 책상.


프롤로그에 쓴 문장 하나를 다시 옮긴다. 기회는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어떤 경우 그것은 예상치 못하게 부여되거나 그간 축적된 자신의 결과물로 말미암아 ‘탄생’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쓰던 어두운 밤의 기록들이 ‘N잡러 일기’ 같은 게 되어 있을 것이라고 나도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니까.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영화와 일상의 순간들을 생각하고 붙잡아 어떤 훗날의 스스로를 향해 기록의 형태로 쓰고 저장하고 업로드한다. 이것이 앞으로도 내 직업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대여 외로워마시오
모든 길들은 결국 다 이어져 있소
막다른 길 끊어진 길도 밟아가다 보면
먼 훗날 뒤돌아 볼 때
그대의 소로가 될 테니’

-심규선, 「소로」 중에서, 『소로』, 2021

브런치북 [영화가 끝나고 쓰는 N잡러 일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동진,
취미는 '천천히', 특기는 '꾸준하게'로 삼으며 영화에 관해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사람.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이전 13화 12. 다음 강의 장소는 어디가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