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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21. 2023

12. 다음 강의 장소는 어디가 될까?

비일상의 타지에서 만나는 이야기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비롯한 많은 문화생활 환경이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서울에 거주하는 내게는 불편 없는 일이지만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콘텐츠를 감상하는 일이야 IPTV나 OTT와 같은 극장 외 플랫폼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취향을 만나거나 발견하는 일에 극장과 같은 장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므로, 지역적/지리적 여건에 따른 문화생활의 접근성 측면에서도 종종 생각하게 된다. 종종 타지로 글쓰기 강의를 하러 갈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청주에 다녀왔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이 운영하는 '김수현드라마아트홀'에서 2주에 걸쳐 '내 취향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문화콘텐츠 리뷰 쓰기' 강의를 했다. 몇 해 동안 여러 차례의 강의를 했지만 이전까지와 달라진 게 있다면 (영주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오신) 엄마와 (청주에 사시는) 이모가 ‘청강’을 하셨다는 점. 아들 강의하는 것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 하셨던 엄마의 제안(?)으로 성사된 가족 만남이기도 했다.

맨 뒤에 앉아 계셨던 엄마는 (내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은 탓에) 모든 내용이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대단하다고 해주셨다. 처음으로 가본 청주는 여느 서울 바깥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고 조금은 더웠지만 오송행 기차와 용산행 기차 사이의 시간 여유가 강의 시간을 빼고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그런 데로 출장과 여행 사이 어디쯤의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지자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강의들은 대체로 참석 연령층이 다양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N잡’ 이야기부터 좋은 책과 좋은 영화를 찾는 법, 장면 등을 더 잘 기억하는 법, 스틸컷 사용 관련 저작권 이야기 등에 이르기까지 질문도 넓은 범주에서 나온다. 강의를 하면서 듣는 이들의 표정을 가능한 빼놓지 않고 한 명 한 명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잘 말하고 있나?’ 같은 물음에 나름의 답을 얻게 되기도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질문의 내용이나 첫 수업 후 과제 공유를 위해 개설한 오픈채팅방에서의 반응 등을 보면 ‘나쁘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된다.


청주시 '김수현드라마아트홀'에서(2023.09.09.)



https://brunch.co.kr/@cosmos-j/1144


대구 지역의 유일한 독립영화 전용 극장인 '오오극장'에도 강의를 하러 다녀왔다. 한 독립잡지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이 극장의 개관 당시 프로그래머 님을 인터뷰하러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5년 만이었다. 프로그래머 님은 여전히 거기 계셨고, 기억 속의 공간과 여러모로 달라진 극장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제법 오래 교류한 영화 애호가 분을 극장에서 뵙기도 했다.


지방 출강을 자주 해본 것처럼 글을 시작했지만 청주와 대구를 제외하면 나머지 강의 장소는 (부천 제외) 모두 서울이었다. 타지에서 강의 제안이 오면 어쩔 수 없이 고려하게 되는 건 교통비와 이동시간이다. 예컨대 KTX를 타고 오송역이나 동대구역에 내린다고 해서 거기 강의 장소가 있는 게 아니라 버스나 택시 등을 이용해 또 이동해야 하기 때문.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시 조례 등에 따라 강사료가 일정한 기준으로 책정되어 있다. 당연히 교통비와 같은 부대비용이 따로 책정된 게 아니기에 소위 '시간 대비 효율' 같은 것을 따져보게 된다. 감사하게도 그동안은 강의 준비와 이동에 들이는 시간 대비 충분한 강의료를 받았던 것 같다. 문화와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소위 '가성비' 같은 걸 따지는 건 죄송한 일이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특히 주말에 일정시간을 할애해야 하다 보니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앞으로도 타지에서 출강 제안이 온다면 시간과 여건이 되는 한 최대한 성실히 준비해 지역 분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



물리적 거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온라인으로) 주 페루 대한민국 대사관의 초청을 받아본 적도 있으니 여러 플랫폼과 소셜미디어 등을 이용하면 영화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에 있어서 지리적인 제약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서울 어딘가에서 강의하는 일이 마치 일상의 영역이라면, 타지로 향하는 일은 비일상의 영역이다. 일찍이 <레디 플레이어 원>(2018)에 관한 긴 리뷰에서 쓴 것처럼 '극장'으로 영화를 만나러 가는 일은 일상공간을 벗어난 비일상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일이다. 내게는 말하자면 타지에서의 강의가 그러한 일과도 같다. 앞으로는 또 어떤 곳을, 어떤 사람들을,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N잡러로 영화를 매개로 한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경험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안에만 갇혀 있었다면 기존에 내가 누리던 환경이 주는 편안함을 넘어 또 다른 환경을 만나는 일에 소홀했을 것이지만 영화가 끝난 뒤 글을 썼고, 쓰는 일을 계속했다. 몇 년에 걸쳐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다 보니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아카이브(Archive)가 되었다. 그것을 보고 어디선가 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제안이 오고, 과거의 기록들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지금을 만들어주었다고 여기며 나는 버스를, 지하철을, 기차를 타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러 이동한다.


영화 '물꽃의 전설' 포스터
그 무렵 본 영화 - <물꽃의 전설>(2023.08.30 개봉)

(...) 다큐멘터리로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동시대의 현장, 그리고 그 시대에만 가능한 어떤 가치를 기록하는 일이라면 <물꽃의 전설>은 기록물로서 최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이대로라면, 만약 지금으로부터 제주 바다가 더 좋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고희영 감독은 사라져 가는 것들로 제주의 언어, 제주의 해녀, 그리고 제주의 바다를 모두 꼽는다. 이제는 현순직 해녀의 기억에만 생생히 남아 있는 '물꽃', 달라진 해양 생태계, 줄어드는 해녀의 수.

그것이 정말 '전설'이 되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하지는 않지만, <물꽃의 전설>이 수중촬영으로 담아낸 경이로운 풍경과 다년간에 걸쳐 포착해 낸 밤의 달, 그리고 물질을 마치고 골라낸 해산물을 제작진에게도 나눠주는 할머니의 굽은 등 같은 것이 많은 울림을 생성해내기도 한다. 애써 무엇인가를 발화하지 않아도 단지 어떤 삶의 모습과 역사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만으로 더 많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어떤 스토리텔러는 진작에 간파하고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카메라를 꺼낸다.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한 매 프레임이,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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