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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19. 2018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해요?"

영화와 문학을 읽는 이유, 그럼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해요?" 누가 물었다. 네, 바꾸고 싶어요. 아니, 적어도 바꾸는 데 도움은 주고 싶어요. 나는 전면에 나서는 행동가는 되지 못한다. 산책은 좋아하지만 이 날씨 좋은 날에도 동네 카페에 가만히 앉아 책 읽고 글 쓰고, 컴컴한 극장 상영관에 앉아 영화에 빠져들 뿐인 사람이다. 그러니 어쩌면 난 세상을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대신 나는 이런 이야길 꺼냈다. 더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보고, 그것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만이 적어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믿는다고.


집 근처 극장에서 심야로 <레슬러>를 볼 때의 일이다. 내 또래로 추정되는 세 명의 남녀가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중 자신의 앞자리에 신발을 벗고 발을 올린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래, 여기가 당신의 안방이겠지. 윤보영의 시가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어떤 광고를 보자 그의 입에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나는 그걸 가리켜 말을 했다가 아니라 말이 튀어나왔다고 표현할 것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고 누구와 무슨 관계를 맺고 있을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어떤 현상을 보고 단 1초의 생각할 여유도 가지지 않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그 사람은 극장을 극장이 아니라 안방으로 여기고 있었다.


극장 관객의 기본적인 에티켓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나는 피해를 보는 주위 관객이 예민한 게 아니라, 에티켓에 대한 무지를 일상화 한 이들이 둔감한 것이라고 적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주위에 나와 같이 오락을 즐기고 싶어 하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둔감함, 즐거움이 나에게만 허락되어도 좋다는 둔감함, 타인의 예민을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둔감함. 둔감한 이들은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에 인색하다. 아니, 타인의 마음을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존중받아야 하는 고귀한 손님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강의 준비를 할 게 하나 생겨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뒤늦게 읽고 있다. 영혜는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주변인의 반응은 "이 맛있는 걸 안 먹겠다고?" 아니면 "나 고기 먹어야 한단 말이야!"다. 세상의 대부분의 폭력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채식을 하기로 한 이유를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그가 채식을 선언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질문하는 게 아니라, 도대체 왜 고기를 안 먹겠다는 거냐며 윽박지를 때. 채식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육식을 강요할 때. 나는 타인의 마음에 둔감한 것과, 타인에게 어떤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 그다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서는 일말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하면서도 나는 대중을 신뢰하지 않는다. '네티즌'이란 말을 '오글거린다'는 말만큼이나 싫어한다. 이들은 군중에 그치지 공동체가 되지는 못하니까. 이 사회에 토론 문화가 잘 정착돼 있다고 여겨본 적도 없다. 연예인에게 공인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도덕성을 검열하며 타인의 삶에 그렇게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타인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스스럼없이 폭력을 가하고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내 것이 나에게 좋은 것처럼 다른 것은 다른 사람에게 좋을 거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생각하기 보다 소비하려 하고, 헤아리기에 앞서 판단부터 하려 드는 그런 사회에서, 영화와 문학이 어떤 영향을 주었으면 한다는 게 세상을 바꾸고 싶냐는 물음에 대한 내 답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문화를 소비에 그치지 않고 잠시나마 생각하고 향유하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감정과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그것에 한 줌의 경청이라도 갖출 줄 안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덜 폭력적이고 더 인정 있는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말마따나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고 나는 세상을 바꾸는 부류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말이다.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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