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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17. 2019

기록이 나를 먹여살리지는 못하지만

순간을 계속 쓰겠다는 마음

구구절절 썼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통해 기록하는 일은 삶에 실리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 쓴 만큼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많은 사람이 읽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읽어준다고 해도 그뿐이다. 한 편의 글이 마치 세상을 바꾸는 일 같은 대단한 포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밥을 벌어다 주지도 못한다. 글쓰기는 무엇보다 쓰는 사람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앞에서 적었다. 밥벌이도 되지 않는 사적인 글을 쓰는 일이 그렇다면 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세상에 재미난 콘텐츠가 너무나 많고 해야 할 일도 넘쳐나는데 시간을 들여서 유명하지도 않은 글을 쓰는 일이, 쓸모가 있을까. 쓸모 없는 글을 긴 시간을 들여 생산해내는 건 아닌가.


처음 블로그에 영화에 관해 끼적인 건 6년 전 여름이었다. 원래 내가 리뷰를 쓰기 시작한 건 영화산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지만 의미는 다른 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훗날 시간이 지났을 때 언젠가 극장에서 본 한 편의 영화에 대해 떠올려본다면, 그때 과연 무엇을 얼마나 기억할까. 그 영화를 함께 본 사람? 관람한 극장의 이름? 감독과 배우 이름? 그 영화가 재미있었다는 사실? 어느 날 나는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물론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볼 때도 중요한 것은 그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형언하기 힘든 상호작용이다. 비록 영화가 끝난 후 그 생각들과 감정들이 휘발된다 하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영화가 선사한 이야기는 간접 체험의 형태로 내게 남는다. 하지만 분명 웃고 울며 빠져들어 관람한 영화를 시간이 흘렀을 때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은 꽤 슬프게 느껴졌다.


본 영화에 대해 무엇인가를 끼적이는 일은 결국 반드시 사라지고야 말, 휘발되어 없어지고야 말 그 순간의 생각과 감정을 문자 언어의 형태로 붙잡아 보관해두는 작업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이라고 하면 대학 진학이나 졸업, 취직, 결혼과 같은 '사건'들에만 있지 않다. 우연히 만난 어떤 영화, 어떤 사람, 어떤 책. 누군가를 만나거나, 문화와 오락을 만나는 일은 대체로 무슨 일이 있었지 않은 한 중요한 사건처럼 기억되지는 않는다. 매년 수백, 수천 편의 영화가 쏟아지는데 한 편 한 편 다 기억할 리도 없고.


그러나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사람은 타고난 면도 있지만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면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글로 적어두었다. 어떤 영화를 보고 '감정을 단순히 정의하지 말고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보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글로 적어두었다. 어떤 영화를 보고 '결국 뻔한 답이지만 모든 것은 사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글로 적어두었다. 영화 평점 기록 및 큐레이션 서비스 '왓챠'에 따르면 내가 평점을 남긴 영화는 1,410편, 코멘트를 남긴 영화는 824편이다. 물론 글로 적어두었다 해도, 아무리 상세하고 생생하게 기록했다 해도 그걸 다 헤아리진 못한다. 일정량 이상의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누군가와 영화 이야기를 할 때도 아주 최근작이 아니라면 과거에 남긴 기록을 들춰보거나 검색을 하고서야 '아 그런 영화였지' 하고 상기하게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들춰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영화가 내 인생에 중요한 깨달음이나 영감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어떤 영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무엇이 되어 있곤 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봤었나...? 재밌게 봤던 것 같기는 한데 누가 출연하는 영화였더라...?' 하는 것보다 내 기준에서 더 가치 있는 건 그 영화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었는지를 잊지 않는 일이며 그 잊지 않음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록이다. 읽은 책에 대해서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나 그날그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것이 곧 역사가 된다.


또 영화에 대해 기록하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그 사소함을 기록하는 일이 곧 삶의 순간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기록에서 중요한 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에 대해 기록하려면 그 영화를 '잘' 봐야 한다. 놓치지 않고 장면 하나하나를 주시해야 하며 그 영화가 쏘아내는 이미지들 각각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재미있었다!' 같은 단편적인 감상이 아니라 그 영화의 무엇이 어떻게, 왜 나를 매료시켰는지를 생각해보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지만 아무 기록도 남겨두지 않은 영화보다 한두 문장으로라도 무엇인가를 남겨둔 영화가 훨씬 더 오래 간직되리라는 사실은 말할 수 있다.


다시 영화 기록에 대해 말하자면, '내게 다가온 모든 영화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잊지 않고 다 기록해두겠어!' 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 영화를 보는 순간의 내 생각과 감정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소한 것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으려 노력하겠다'는 자세가 곧 내 영화 기록의 자세이자 마음가짐이다. 극장에서 여덟 번을 관람한 영화도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고, 몇 천, 몇 만 자의 글로 기록해둔 영화도 그 세부를 전부 알고 있지는 못하다. 물론 누군가 "너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여덟 번이나 본 사람이구나! 대단해!" 하고 추켜세워주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기록하는 일의 의미는 늘 그 순간이 아니라 지나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쓰는 일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하게 되면 글쓰기를 오래 할 수가 없다. 오직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체가 영화와 나 사이에 어떤 연결을 만들어주는 소중한 일이라는 인식과,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자세일 것 같다.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삶'을 꿈꾸면서도, 그 크고 불확실한 행복을 믿으면서도 나는 다만 쓸모없는 글을 계속 쓴다. 오직 나에게만 쓸모 있을, 사적이고 장황하며 전문적이지도 않은 문장들을. 지금도 그렇지만, 내일도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면서.





*신세계아카데미 겨울학기 영화 글쓰기 강의: (링크)

*4주 영화 글쓰기 클래스 <써서 보는 영화> 11월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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