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좀 해주세요
최근에 고민이 하나 생겼다. 어쨌든 재테크라 함은... 시드머니가 필요한 법이지 않은가? 시드머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근로 소득이 필요하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소비 통제만 잘해도 시드머니를 마련하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나 같은 프리랜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세상에 수많은 프리랜서가 있겠지만 나는 고용되는 프리랜서다. 영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상업 영상 한 편을 만들기 위해 판을 깔기는 어렵다. 한 편의 영상에 투자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영상을 만들기로 결정이 나야 나는 일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일이 별로 없다.
다행히도, 생활비 정도는 벌고 있다. 후배가 숏폼 회사에 있어서 소개를 통해 프리랜서직으로 고용되었는데 작업 여건이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수익 0원보다는 낫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어쨌든 일은 일이고,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은 프리랜서에게 정말이지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뭐가 고민이냐고? 이 일을 계속할지 말지가 고민이다. 내가 주로 일을 하는 업계는 영상 중에서도 영화다. 영화업계의 경기가 나빠진 지는 한참 됐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경기가 별로다' 같은 말이 돌더니 매년 더 안 좋아졌다. 한국 영화계가 주춤하는 동안 업계 사람들은 '3년만 버티자' 같은 말로 서로를 북돋으며 지내왔다. 나도, 내 친구들도, 선배들도, 후배들도 모두모두 버티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버티면서 영화 외에 다른 영상업에서도 내 직군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떠돌았다. 숏폼까지 흘러왔는데, 같은 직군이지만 영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영화가 디테일하고 천천히 공을 들여 상상력을 펼치고 여러 길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면, 숏폼은 디테일보다는 빠른 속도와 한 길의 정확도에 집중한다. 두 가지 다 이점이 있겠지만 영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숏폼의 작업 방식이 매번 어렵다. 숏폼의 작업 방식에 적응하게 된다면 다시 영화로 돌아갔을 때 또 어렵다고 느낄 것 같아서 걱정이다.
지금의 회사는 앞으로도 종종 나와주길 원하는 것 같다. 당장에 이번 촬영이 끝나면 바로 다음 촬영에 와줄 수 있겠느냔 질문을 받았다. 이 회사는 해외의 다른 회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어서 종종 외국인 배우들과 영어 대본으로도 촬영을 하는데, 다음번 작품은 그런 작품이라 아예 모든 작업을 영어로 해야 한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나로서는 공부한 영어를 써먹어 볼 좋은 기회인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걸 계속해서 나한테 어떤 이점이 있을지를 자꾸 고민하게 된다.
생활비를 벌고 시드머니를 마련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영상 문법도 다르고 작업 방식도 다르고... 그렇다고 한국 영화가 다시 부흥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숏폼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어서 한국에서도 만들어지고 있는 건데, 요즘은 인스타그램에 숏폼 드라마 광고도 눈에 띈다. 실제로 아직 숏폼 드라마를 본다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지만, TV드라마도 30초~1분씩 잘라서 인스타로 보는 요즘이니 언젠가 정말로 숏폼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야 하는 걸까? 눈앞의 돈만 보고 움직이기엔 생각이 많다.
주식 및 코인 투자로 한 달에 100만 원씩만 벌어도 조금 더 선택지가 많을 텐데, 그러려면 시드머니가 더 커야 한다. 지금도 조금씩 불려 나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시드머니가 150만 원이 안 되는 상태라 재테크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남들은 몇 천만 원씩 턱턱 잘도 투자하던데, 그런 돈은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축액을 제외하고 '없어도 되는 돈'이 시드머니가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쨌든 내가 투자 고수도 아니고 재테크 고수도 아니니까 잃어도 크게 지장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시드머니가 쉽게 늘지 않는 것도 같고.
소비통제는... 늘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매번 말처럼 쉽진 않다. 날이 너무 더우니까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싶고... 물가는 오르고... 일은 없고... 소비통제를 열심히 하는데도 통장에 돈이 드라마틱하게 쌓이진 않는다. 받는 돈이 적은 건 아닌데, 받는 빈도가 적다 보니 결국에는 수익이 그렇게 크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뭘 선택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외면하고서라도 돈을 버는 게 맞을까? 아니, 외면하는 것도 아니지. 아예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7월 들어 국회 본회의에서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한 지원 사업이 복원되었고, 영화 할인 쿠폰 관련 추경안도 통과됐다. 하지만 영화진응위원회 한국영화 기획개발지원사업 증액과 차기작 지원사업 복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투자소진율이 높지 않아서라는데, 업계 사람으로서 이해가 되면서도... 답답한 실정이다. 예전에 함께 작품을 했던 선배가 생각난다. 30년을 넘게 영화업에 종사한, 머리가 희끗한 할저씨였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눈 적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30억 대나 그 이하의 작은 영화들을 많이 찍어야 해. 그래야 스탭들이 살지.'
그때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100억, 200억짜리의 거대한 영화들이 흥행하고 있을 때였다. 늘 '제작비 100억짜리 큰 영화 하고 싶다!'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더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100억짜리 영화 한 편 보다, 100억을 가지고 영화 세 편을 만드는 게 영화업계 전반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제작비가 100억 씩이나 되면 투자자들은 실패의 여지가 있는 시나리오나 감독보다 무조건 성공할 시나리오와 감독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유명한 감독, 유명한 영화 제작사, 유명한 스탭들이 아니면 그 작품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커리어가 필요한데 그 커리어는 도대체 어디서 쌓으라는 말인가? 조금 더 작은 영화에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도전을 하고 거기서 노하우를 쌓으며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게 맞지 않은가?
어차피 이렇게 말을 해도 이 산업 구조를 내가 바꿀 순 없을 것이다. 내가 정말 유명한 감독이라도 되면 모를까... 어쨌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부조리한 세상에 어떻게든 버티는 것일 테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답답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걸 선택한 게 나인데... 그저 경제적인 목표와 삶의 지향점 사이에서 방황하며 잘 고민해 봐야겠지. 혹시 삶에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적이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게 힌트를 주면 좋겠다. 지금은 그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다. 사는 건 정말 쉬워지지가 않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