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고 싶은 순간에 기댈 수 있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by 어진

해가 너무도 뜨거웠던 작년 여름, 연남동이라는 동네가 지닌 바이브가 너무 좋아서 큰 공간을 덜컥 계약을 하고는 들뜬 마음도 잠시였고, 이내 현실을 직시하게 되자 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갈피를 종잡을 수 없기에 어제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해보자’ 하다가도 오늘은 절망에 사로잡혀 ‘이대로 망하는 게 아닌가’라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목동에서 연남동으로 이전할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고 나서 불과 이십여 일 채 지나지 않아 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이제 모든 사업을 접고 잠시 쉴 거라고 말하며, 3일 정도 매장 문을 닫고 남해로 울산으로 무작정 차를 몰아 도망쳤다.


그 후로 지옥 같은 시간은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간신히 잠에 들었다가 새벽 3시쯤 놀라서 깨면 머릿속에는 연남동의 텅 비어있는 커다란 공간이 악몽처럼 떠올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어도 지불해야 되는 엄청난 금액의 임대료는 계속해서 나를 짓눌렀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으며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만큼 온라인 유료 클래스 개설을 소개받아 그 일들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루는 성실히 오고 성실히 흘러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목동 매장은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연남동 매장의 임대료는 차곡차곡 쌓여갔으며 온라인 클래스 오픈 일은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해놓은 것이라곤 거의 없는, 숨이 막히도록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가 있었고, 실제로 일을 해주시는 분들의 수고가 있었다.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한기가 도는 겨울이 되어서야 매장의 인테리어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강의 영상 촬영과 편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 7시에 목동 매장으로 가서 두 시간 정도 강의 촬영을 하고 11시까지 연남동 매장으로 출근해서 저녁 8시까지 카메라 설명과 손님 응대를 했다. 한 시간 정도 저녁을 먹으면서 잠시 쉬고 9시부터 새벽 1-2시까지 영상 편집을 한 뒤, 잠시 눈을 붙이고는 다시 목동 매장으로 가서 강의 촬영을 하는 루틴한 강행군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어서 카펫이 깔린 바닥에 사진 배경용 모슬린 천을 이불 삼아 3-40분 정도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나서 영상 편집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에는 아내와 혜원이와 짧게 페이스타임을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고, 새해 당일에도 어김없이 편집을 하면서 올 해를 시작했다.

1545745077063.jpg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던 괴로운 시절.





연남동의 새로운 매장이 신기했던지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고, 목동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업무량의 3배 정도를 상회했다. 근 10년 만에 잡아보는 영상편집기도 신기하리만큼 손에 익어 밤새 편집을 하고 간신히 오픈 일정에 맞출 수가 있었다. 지난 5개월 동안 잠을 잘 수 없도록 만들었던 눈덩이처럼 쌓인 임대료도 전부 털어냈고, 3년을 함께 했던 목동의 매장은 두 달 정도 후에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모든 상황들이 정상의 궤도로 올라왔다고 느껴지는 순간, 꽉 조여져 있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3월은 종일 내내 눈물만 흘렸다.


어느 늦은 밤 퇴근길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바로 옆집에 사는 동네 형님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계신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선 여름에 아이슬란드로 사진을 찍으러 가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시기에 부럽다고, 잘 다녀오시라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까닭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혜원이가 놀라며 두 팔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내 턱을 살며시 혜원이 머리에 올리고 한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다가 “아빠 이제 괜찮아. 고마워”라고 하니 혜원이가 그제야 두 팔을 풀고 서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괜찮아요?” “응 정말 괜찮아, 왜 그런지는 아빠도 모르겠는데 그냥 눈물이 났어” “알겠어요” 두 손으로 얼굴을 쓱 닦으며 “놀랐지?”라고 하니 “아니에요”라며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을 한다. 아주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기대고 싶은 순간에 기댈 수 있는 내 편이 한 명 더 늘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혜원이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로.. 스페인 그라나다. 2019.


photo by 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