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해철이형을 기리며)
1990년 가을,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뒷자리에서
신해철의 '안녕'을 완창하며 곧바로 반의 가수로 급부상했다. 선행학습이 이뤄지지 않던 시절에
ABC도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RAP(당시엔 랩 자체가 충격인데 심지어 영어로..)을 읊조리니
모두들 놀랄 수밖에..! 중학생이었던 형이 신해철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옮겨 적기(한글로)한 덕을
내가 톡톡히 본 것인데 그 후로 졸업하기 전까지 대체 '안녕'을 몇 번이나 더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신해철은 내게 그냥 우상이었다.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음악들.
그러다가 또 TV CF에서는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마'라며 설레게 만드는 스윗한 눈망울과 목소리.
진부한 표현이지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신해철의 음악을 들었던 시절이었다.
신해철 2집은 전 수록곡이 모두 좋은 명반임에도 개인적으로 꼽는 베스트는
마지막 트랙의 '길 위에서'와 '나에게 쓰는 편지'이다. 두 곡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
'길 위에서'는 무언가 좀 더 웅장하고 심오한 분위기로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나에게 쓰는 편지'는 도입부의 빠른 템포와 달리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혼자 걸을 때 흥얼거리기에 더 알맞은 곡이었다. 중학교 2학년 등하교길에
계속 이 노래를 부르며 가사 속의 '나'에 실제적인 '나'를 오버랩시키고 있었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지만 신해철도 기껏 스무 살 초중반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가사를 적고 이런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던 거지?
당시 고흐가 누구인지, 니체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해철이 형이 좋다니
그냥 위대한 사람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상처입은 분노라니!!)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이 노래가 발표된 지 거의 30년이 흘렀음에도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지금의 상황에 너무 적합해서.. 그리고 요즘의 사람들에게도 적확해서
깜짝 놀라곤 한다. 분명 앞을 내다본 것도 아닐 테고, 시대상을 반영한 것도 아닐 텐데
지금의 이 노래가 여전히 작은 위로가 되어주니 말이다.
새벽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새롭게 운영할 공간의 이름을
'나에게 쓰는 편지'로 지으면 좋을 것 같아서 기록해두었다.
'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들에게 편지지를 함께 제공해서
스스로에게(혹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면 괜찮겠는데!'
처음엔 늘 누구나 부끄럽고 창피한 법이지만, 시간이 흘러 익숙해질 때쯤 되면
내 어린 시절에 해철이 형 노래를 듣길 잘했다고 생각하겠지.
"나에게 쓰는 편지" by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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