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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Jun 01. 2021

나에게 쓰는 편지

(feat. 해철이형을 기리며)


1990년 가을,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뒷자리에서

신해철의 '안녕'을 완창하며 곧바로 반의 가수로 급부상했다. 선행학습이 이뤄지지 않던 시절에

ABC도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RAP(당시엔 랩 자체가 충격인데 심지어 영어로..)을 읊조리니

모두들 놀랄 수밖에..! 중학생이었던 형이 신해철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옮겨 적기(한글로)한 덕을

내가 톡톡히 본 것인데 그 후로 졸업하기 전까지 대체 '안녕'을 몇 번이나 더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신해철은 내게 그냥 우상이었다.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음악들.

그러다가 또 TV CF에서는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마'라며 설레게 만드는 스윗한 눈망울과 목소리.

진부한 표현이지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신해철의 음악을 들었던 시절이었다.


신해철 2집은 전 수록곡이 모두 좋은 명반임에도 개인적으로 꼽는 베스트는

마지막 트랙의 '길 위에서'와 '나에게 쓰는 편지'이다. 두 곡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

'길 위에서'는 무언가 좀 더 웅장하고 심오한 분위기로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나에게 쓰는 편지'는 도입부의 빠른 템포와 달리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혼자 걸을 때 흥얼거리기에 더 알맞은 곡이었다. 중학교 2학년 등하교길에

계속 이 노래를 부르며 가사 속의 '나'에 실제적인 '나'를 오버랩시키고 있었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지만 신해철도 기껏 스무 살 초중반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가사를 적고 이런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던 거지?

당시 고흐가 누구인지, 니체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해철이 형이 좋다니

그냥 위대한 사람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상처입은 분노라니!!)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이 노래가 발표된 지 거의 30년이 흘렀음에도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지금의 상황에 너무 적합해서.. 그리고 요즘의 사람들에게도 적확해서

깜짝 놀라곤 한다. 분명 앞을 내다본 것도 아닐 테고, 시대상을 반영한 것도 아닐 텐데

지금의 이 노래가 여전히 작은 위로가 되어주니 말이다.


새벽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새롭게 운영할 공간의 이름을

'나에게 쓰는 편지'로 지으면 좋을 것 같아서 기록해두었다.

'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들에게 편지지를 함께 제공해서

스스로에게(혹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면 괜찮겠는데!'

처음엔 늘 누구나 부끄럽고 창피한 법이지만, 시간이 흘러 익숙해질 때쯤 되면

내 어린 시절에 해철이 형 노래를 듣길 잘했다고 생각하겠지.


 

"나에게 쓰는 편지" by 신해철


https://youtu.be/HRlwPwqC-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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