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부른 이름
햇살은 오늘따라 유난히 부드러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 아래,
아이의 그림자는 조용히 바닥에 길게 눕고 있었다.
그림자조차 나와 함께 걷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아침.
아이의 발끝은 어느새 낯선 동네의 작은 골목에 다다라 있었다.
처음 보는 전봇대, 처음 맡는 가로수 냄새.
풍경은 낯설었지만, 마음은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 따뜻한 손으로 등을 밀어주는 듯한 기분.
아이의 등 뒤에서 햇살이 천천히 손을 얹었다.
언제나처럼 말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걷다 보니 작은 빵집이 나왔다.
노란 간판이 오래된 동화책의 표지처럼 해바라기 잉크로 칠해져 있었고,
문 앞에는 흘러나온 반죽 냄새가 아침 공기와 섞여 있었다.
입구에 걸린 작은 종이 문이 열릴 때마다 딸랑 울렸다.
아이는 그 종소리를 들으며 망설였다.
배가 고팠지만, 주머니에 든 것은 오래된 손수건과 별 하나뿐.
그 순간, 안에서 누군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빵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입은 아주머니였다.
“잠깐만 기다려줄래?”
그녀는 잠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바게트 하나를 종이에 싸 들고 나왔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나랑 약속해 줄래? 꼭 이걸 맛있게 먹어주기로.”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투에는 이상하게도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따뜻함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전체가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의 목에, 눈에, 가슴 깊은 곳에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름 없이 살아온 시간,
불린 적 없는, 혹은 불리고도 반응할 수 없었던 날들.
그 모든 침묵의 시간들이 햇살에 녹듯 녹아내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또박또박 인사한 건 오랜만이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빵의 온기가 마음까지 데웠다.
바삭하고 따뜻한 그 맛은, 단지 빵이 아니라
세상이 아이를 ‘존재하는 누군가’로 인정해 준 순간의 증명 같았다.
그날 오후, 아이는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작은 메모지 조각 위에 천천히 글자를 적어봤다.
‘나는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살짝 덧붙였다.
‘오늘, 햇살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란,
존재를 감추는 연습 같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기 위해,
누구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늘 조금씩 몸을 웅크리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숨 쉬는 것조차 조용히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진짜 조용함은 존재를 지우는 게 아니라
존재를 품어주는 또 다른 언어라는 걸.
그렇게 햇살이 오늘 하루를 통해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바닥에 말을 새기고 있었다.
아이의 발밑에도 글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언어, 읽히지 않는 문장,
그러나 마음으로는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
그것이 바로 자기 이름이 불리는 순간의 감각이었다.
멀리서 아이 또래의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갔다.
그중 한 아이가 아이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름을 모르면서도,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그 손짓 하나가 ‘같이 놀자’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누구도 이방인처럼 대하지 않는 오늘이라는 하루.
아이도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순간, 마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는 것처럼
햇살이 한 줄기 더 따뜻하게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래, 나 여기 있어."
그 말은 목소리로 나오진 않았지만,
눈동자 속에서, 발끝에서, 웃음기 묻은 입꼬리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분명히 세상은 그걸 알아차렸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아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밤, 아이는 공책 한 귀퉁이에 다시 적었다.
‘나는 있다.
나는 불렸다.
햇살이 내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걸 내가 기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