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방
지하 2층.
지도에는 없는 그곳은, 오직 낡은 건축 도면에만 존재했다.
아진은 민호가 건넨 병원 구조 설계도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평면도였다. 하지만 복잡하게 교차된 도면 선들 사이, 이상한 여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샤프트 옆, 벽과 벽 사이 숨겨진 공간.
“여기, 도면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방이 있어요.”
“그쪽이… 병원 물류 통로 쪽인데,” 민호가 말했다. “근데 저 방, 저희 직원 중 누구도 본 적 없어요.”
말끝을 흐리며 민호는 노트북을 켜고 보안기록을 불러왔다. 아진은 도면을 따라 지하 구조를 손가락으로 짚어내며 눈을 좁혔다. 도면에는 표시되지 않은 비밀 통로와 벽 너머 공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샤프트 맞은편,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부분.
“폐쇄된 실험실…” 아진이 중얼거렸다.
현장 사진에는 부서진 철문과 쓰다만 의료장비, 떨어진 전선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히 자리를 떴다는 듯, 모든 것이 중단된 채 멈춰 있었다.
그리고, 낡은 RFID 리더기 조각.
“이건... 일반 병원에서 쓰는 보안장치가 아니에요.”
민호가 한 손으로 리더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표면은 긁혀 있었고 내부 칩셋 일부가 노출돼 있었다.
“RFID 인식 범위가 꽤 좁은 고급형이에요. 주로 정부기관, 특히 보건 쪽 연구소 같은 데서 많이 써요. 병원 보안 수준으로는 과한 장비죠.”
아진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했다. 며칠 전, 익명의 계정으로 도착했던 이메일이 다시 떠올랐다. 첨부된 메일에는 짧은 문장과 함께 스캔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 ‘실험은 끝났지만,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그 사진 속 인물. 병원의 전 이사장이자, 현직 보건정책연구소 고문. 그리고 과거 보건복지 상임위원회 국회의원이었던 인물. 차영만.
그의 곁에는 언제나 같은 인물이 서 있었다. 정책 보좌관 출신의 현 대성메디컬그룹 정책이사, 박기문.
“혹시 이 사람들, 본 적 있어요?”
아진은 태블릿 화면을 민호에게 돌려주었다. 화면 속 인물들 얼굴을 본 순간, 민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영만… 병원이 인수되기 전에 VIP라 불렸던 사람이에요. 의료진보다 권한이 더 세다던데… 박기문은 항상 그 옆에 있었고요.”
“그들이 이 병원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제해 왔다는 말이군요.”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장에 이름을 적었다. 차영만. 글씨는 단호했고, 잉크는 점점 굵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 조심스럽게 적힌 또 하나의 이름.
장하율.
잉크색은 붉은빛이었다. 물속에 빠진 기억처럼 번져 있었다.
그녀는 실종된 게 아니었다. 지워진 것이었다.
하율의 얼굴이 변한 이유, 병원 시스템에서 흔적이 사라진 배경, 그리고 병원 측의 냉담한 반응. 이 모든 것이 우연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의도적 개입. 그것도, 상당한 권력과 자원을 동원한 작업.
“이건 단순한 의료사고가 아니야.”
아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시스템 자체가 조작된 거야. 그녀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바로 그때였다.
조명이 깜빡이며 잠깐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노트북 화면도 함께 번쩍였다.
민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전인가요? 아니, 정전이면 다른 장비도 꺼졌을 텐데…”
그는 사무실 CCTV 화면을 열어 확인했다. 복도 끝, 탐정사무소 문 앞에 누군가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장면이 0.5초가량 찍혔다.
“방금… 사람 지나갔어요.”
민호가 화면을 되감았다. 화면 속 인물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몸집은 성인 남성이었고,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문 앞에 뭐 있어요.”
민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는 적막했고, 먼지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틈에는 낡은 봉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낯선 손길이 다녀간 흔적.
아진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인쇄된 종이 한 장과 메모 한 장이 들어 있었다.
> — 의뢰 철회 요청서
— 이 이상 파고들지 마십시오.
아무 서명도, 연락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메시지였다. "우리가 보고 있다."는 식의 경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아진은 봉투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
조용한 밤이었다.
사무실의 불은 꺼졌고, 창밖으로는 거리의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아진은 아직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메모장 위에 적힌 이름들, 낡은 리더기 조각, 그리고 하율의 사진 한 장.
그녀는 시선으로 그것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림자는 빛보다 먼저 움직인다.'
어릴 적 아버지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오래된 그림자일수록, 더 깊은 어둠을 품지…”
차영만. 박기문. 그들이 병원과 연결된 흔적은 단지 의료 차원이 아니었다. 국가 보건정책, 의학연구소, 그리고 제약회사. 그 모든 이권과 권력이 얽힌 커다란 실타래. 하율은, 그 모든 그림자에 삼켜진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진은 알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실종된 한 사람’이 아니라, 지워진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아진은 봉투 속 메모지 뒷면을 유심히 살폈다. 희미하게 번진 얼룩, 그리고 은밀하게 새겨진 숫자. 13802.
민호가 말했다. “번호 같기도 하고, 보안코드일 수도 있어요.”
“그림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 진짜 오래된 그림자는 항상 바닥에 깔려 있어. 우리가 못 본 척할 뿐이야.”
아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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