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쳐버린 첫눈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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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degard von Bingen — “O vos angeli, qui custoditis animas sub silentio nivis cadentis”
첫눈이 오던 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세상이 하얗게 흔들렸던 그 순간,
나는 단 하나의 눈송이조차 맞지 못한 채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오늘이 첫눈이었음을.
누군가의 사진,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환호를 통해
뒤늦게 소식을 건네 듣듯 알아차렸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첫눈이라는 건,
늘 사람 마음 어딘가를 살짝 건드리는 계절의 장치 같은데
올해 나는 그 장치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첫눈이라지만
이번엔 유난히 더 조용히, 더 야속하게 스쳤다.
내가 본 건
그저 바닥에 희끗하게 남은 잔설뿐이었다.
이미 절반은 녹고,
절반은 바람에 쓸려 굳어버린 흔적들.
그마저도 내가 눈을 맞은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 지나친 자리의 끝자락을 본 것뿐이었다.
그 하얀 잔재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올해 첫눈도 이렇게 놓쳐버렸구나.
나는 특별히 로맨틱한 타입도 아니고
첫눈을 보면 갑자기 약속을 만들거나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다만 첫눈이 가진 ‘첫’이라는 말의 느낌,
새로운 계절의 입구 같은 기분을 좋아했다.
그 느낌을 몸으로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올해 첫눈은
내 마음을 스치기도 전에 지나갔다.
실은 박스를 내놓으려고
현관문을 열었던 그 순간,
하늘에서 흩어지는 무언가가 스쳤다.
비와 눈이 뒤섞인 작은 입자들,
그리고 바람이 생각보다 매서웠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간 나는
찰나처럼 차가운 공기에 움찔했고
“아, 춥다”라는 말만 남긴 채
금세 안으로 도망쳤다.
그게 내가 맞은 올해 첫눈의 전부였다.
얼마나 오래 내렸는지,
얼마나 하얗게 쌓였는지,
세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그저
내가 직접 본 순간 없이 지나가버렸다는 사실만
쓸쓸하게 남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첫눈은 원래 이런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예고 없이 오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위에 내려앉고,
조금만 방심해도
스르르 흩어지듯 사라져 버리는.
매년 첫눈을 맞이하려는 마음은 있어도
대부분 우리는
첫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곤 하지 않던가.
그 흐름이 올해에도 반복되었을 뿐.
창문을 열어보니
세상은 이미 색을 잃어 있었다.
가로등 아래 남아 있는 잔설만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희미하게 빛났다.
그 조각들을 보면서
나는 조금 가만해졌다.
첫눈을 놓쳤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쉬워서,
그 아쉬움이 나를 멈춰 세운 것이다.
이상하게도
첫눈은 사람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올 한 해 동안 무엇을 놓쳤는지,
무엇을 붙잡았는지,
어떤 순간들을 흘려보냈는지
조용히 생각하게 한다.
나는 올해 눈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았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들,
말하고 싶었지만 삼킨 말들,
잡고 싶었지만 손에서 미끄러져버린 순간들.
첫눈을 놓친 마음은
그 순간들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쉬움이 나를 조금 따뜻하게 했다.
놓친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다음을 기대하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괜히 내일 날씨를 찾아봤다.
혹시나 또 눈이 내리지는 않을까,
또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첫눈을 놓친 사람 특유의 소심한 희망이
나도 모르게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첫눈을 기다리는 이유는
‘첫’을 맞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첫눈은 그런 감정을 꺼내준다.
여백이 생기고,
속도가 느려지고,
사소한 것도 마음에 닿는 계절.
내가 올해 첫눈에서 느끼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눈을 놓쳤다고 해서
올해 겨울이 의미 없어진 건 아니다.
첫눈을 보지 못했다고
겨울이 내게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겨울은 원래
천천히 스며드는 계절이니까.
나는 다시 창밖을 봤다.
하얀 조각들은 거의 녹아 있었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조용한 추위뿐이었다.
그 추위마저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첫눈을 놓쳤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다시 겨울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놓쳤다,
그래서 아쉽다,
그래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 간단한 감정의 흐름이
사람을 살짝 성장시키고
살짝 고요하게 만든다.
첫눈이 내린다는 건
세상이 잠시 멈추는 시간이다.
사람들의 걸음도 느려지고
대화도 잦아들고
조용해진 틈으로
자기 마음이 들려오는 날.
나는 그날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지만,
놓친 그 마음이
또 다른 감정을 데려왔다.
첫눈을 맞지 못한 나를
책망할 필요도 없고
아쉬움에 오래 머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계절을 느끼려는 마음 그 자체다.
내가 몰랐던 사이 스쳐간 눈이었을 뿐,
겨울은 여전히 나에게 온다.
때론 첫눈보다
그다음에 내리는 눈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첫눈이 상징하는 낭만이나 설렘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고,
꼭 첫 번째 날에만 허락되는 기분은 아니니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짧은 시간 동안 내렸던 눈발,
내가 미처 잡지 못한 순간,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끝에 남은 작은 여운.
그 여운이 나를 감싸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첫눈은 놓쳐도 괜찮다고.
놓친 자리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오며,
그 겨울 안에서
우리는 다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고.
첫눈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나는 그 스침조차 느끼며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고맙게 느껴졌다.
허공에 흩어졌던 눈들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눈이 남긴 감정은
아직 내 마음 안에 남아 있었다.
그 감정 하나만으로도
올해의 겨울은 충분히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올해 첫눈을 어떻게 맞이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