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회사 - 적당히, 주는 만큼만 할 것
전부터 궁금했던, 대기업 임직원들을 교육하는 회사였다.
정규 채용은 드물었고, 괜히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이기만 했는데, 어느 날 알바몬에 공고가 떴다.
파견 계약직이라 최대 2년까지 다닐 수 있었고, 하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집과 가까웠다. 시작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면접에서 두 명이 뽑혔고, 다행히 그 안에 들어갔다.
내가 맡은 건 남편이 이직하기 전 다녔던 회사의 임직원 교육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친근했다. 게다가 IT업계에서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늘 궁금했던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회사 직원의 대부분은 30대 여성들이었고, 함께 들어간 동료는 스무 살 중반의 어린 친구였다.
요즘 세대를 직접 마주할 일이 없던 내게 그 친구는 마냥 귀여워 보였다.
우리 둘을 포함해 같은 일을 맡은 사람은 총 네 명이었다.
공통 업무는 비슷했다.
한 기수에 100명, 많게는 300명의 임직원이 온라인 수업을 듣는데,
수업 중 공지사항을 알리거나 랜덤 출석을 부르는 일.
내 개별 업무는
슬랙 채널을 개설하고, 매주 시험과 과제를 세팅하고, 안내를 올리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교육생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챙길 일도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본적인 기술 안내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질문은 점점 내게 몰렸고, 찾는 사람도 늘었다.
그때부터 오해가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맡는 걸 두고,
동료 중 일부는 ‘본사 계약직을 노리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듯했다.
그런 생각이 사실처럼 이야기가 돌면서, 나는 누군가에겐 다른 모습으로 비쳤다.
업무를 독점하고, 정보를 나누지 않는 사람처럼.
하지만 내 마음은 단순했다.
남편이 하는 일을 이해하는 게 재미있었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는 게 즐거웠을 뿐이었다.
그때 문득 면세점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게 누군가에겐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었지.’
결정적인 계기는 상사의 질문이었다.
공지와 과제를 담당했던 탓에, 상사가 교육 관련 질문을 내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동료가 결국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저, 회사를 나가겠습니다.”
소문을 만든 동료는 이미 회사를 떠난 뒤였고,
회사에서는 나에게 더 남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멀어져 있었다.
초창기 멤버로서 누구보다 교육 과정에 애정이 컸다.
1년 넘게 함께한 교육생들과도 동료들과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점점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2년을 꽉 채워 보려던 계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걸어온 길들이 이 회사 안에서 하나로 모이는 듯했다.
사무직의 정확함, 서비스직의 유연함, 교육직의 세심함.
그동안 도장깨기를 하며 배운 것들을 발휘할 때마다 뿌듯했다.
그만큼 더 아쉬움이 남는다.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세대가 바뀌면서 기존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는 어떻게 일하는 게 좋은지—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면세점에서도, 교육회사에서도 나는 같은 벽에 부딪혔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미움과 오해로 돌아오기도 했다.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이제는 알겠다.
회사에서 마음을 다 주는 게 꼭 정답은 아니라는 걸.
때로는 주는 만큼만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다는 걸.
그 깨달음 덕분에, 나는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