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혼내는 역할은 매번 나

일본 생활 (벌써 8년째), 넷

by 아초



일본에서도 MBTI가 유행이다. 나는 ENTP 한국 여자.

평소에 감동도 잘 받고 잘 울기도 하는데(?) 주변의 F 친구들이 내게 늘 하는 말은,

'너 티발 씨야?'


백번을 넘게 들어도 무조건 웃음 터지는 한국유머.



내가 봐도 나는 T긴 T다. 아니 ENTP 이외의 결과가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그냥 태생이 ENTP다. 그 특징을 모아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고 있으면 다 너무 맞다. 그리고 참 피곤한 스타일이다 싶다. '토론가'라는, ENTP를 설명하는 찰떡같은 상징적 단어는 누가 뽑아낸 건지,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결함이나 논리적인 모순을 짚어내는 데에 탁월하다'는 설명에는 나도 모르게 끄덕끄덕. 좋게 말해 '논리적'인 성향으로 지금까지 가까운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나..(특히 엄마 미안해)


그런데 웃긴 게 남편 MBTI는 아직도 뭔지 모른다. 한번 해보라고 테스트 화면을 켜 손에 휴대폰을 건네준 적도 있는데, 하다가 도중에 이걸 왜 하고 있나,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혼자서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끝까지 했는지 말았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아니, 하나하나 클릭만 하면 되는데 왜 그걸 어려워하지?



한국에서 아는 동생이 놀러 왔을 때 술자리에서 성격 얘기가 나와서 그 얘길 하니,


"언니! 그게 또 따로 있잖아요. MBTI 끝까지 못하는 MBTI."

"???!!!"


그 말을 듣는데 또 얼마나 웃기던지. 우리 인간들은 어디까지 일반화될 수 있는가...

MBTI에 빠삭했던 그 동생이, 끝까지 못하는 타입은 뭐뭐라고 알파벳을 말해줬었는데 잊어버렸네.







결혼 초에는 늘 미적거리는 남편이 답답하고, 때로는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돌아와 밥 먹을 때나, 드라이브할 때, 어디 여행 갔을 때, 시간만 생기면 모든 주제로 '토론'에 시동을 거는 아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우리 둘의 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은, '남편 MBTI를 모른다고 뭐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라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굳이 굳이 모든 것에 해답을 추구하지는 않게 됐다.




그래도 어쩐지 혼내는 역할은 매번 나다.


혼낼 생각으로 말을 시작하는 건 아닌데, 입을 굳게 닫고 아무 변명도 아무 대책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멀뚱멀뚱 어딘가를 응시하고만 있는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꾸중하는 아내로 스토리가 전개되더라. 핵심은 그게 아닌데 말이다.




어제도 영업이 끝나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는데,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서너 시 즈음 이 동네의 맵을 만들고 싶다며 코시카케야를 찾아온 한 고등학생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 친구는 여러 가게를 방문해서 그곳의 매력을 묻고, 가게 풍경과 함께 인터뷰한 목소리를 영상으로 담을 거라고 했다. 마침 나는 일이 있어서 학생과 인사만 하고 잠시 외출을 했다가 돌아왔는데, 그때 남편은 학생으로부터 코시카케야의 매력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필하고 싶은 점인지, 손님들이 좋아해 주는 부분인지에 따라서도 대답이 달라지는, 가게의 정체성 면에서는 늘 염두에 두고 민감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테마다. 그런데 남편은 진지하게 갈고닦아 둔 답변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편히 쉬다 갈 수 있고, 술도 한 잔 할 수 있는 카레가게입니다.'라며 멋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고, 본인이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해 학생이 돌아가고 나서 다시 한번 대답을 고민해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대답을 찾았다며 하는 말이,


"좋은 손님들이 많이 와 주는 게, 코시카케야의 매력 같아. 어때?"




그 말을 들은 '토론가' 아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논리를 걸고 만다.



"좋은 손님? 음.. 내 생각에는 '좋다'라는 기준을 이쪽에서 정하는 게 너무 겸손하지 못한 대답인 것 같은데? 뭔가를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끼리 있을 때는 가능한 대화지만 제삼자에게 말할 때는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지. 내가 손님 입장으로 들었을 때 썩 기분이 좋지 않네?...........(어쩌고저쩌고)"


"그런가? 근데 진짜 멋진 손님들이 많이 와 주잖아. 그 덕분에 우리 가게 분위기도 늘 즐겁고. 그건 우리 능력 밖의 일이라서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서."


"맞아~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 둘이 항상 하는 얘기잖아. 근데 멋진 손님, 좋은 손님이 많이 오는 게 우리 가게의 매력이다? 그럼 어떤 목적으로 어떤 시선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지. '멋진 손님'이라는 정의를 풀어서 설명한다던가. 예를 들면 본인들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다른 손님들에게 자연스레 대화를 건네는 단골들, 편견 없이 남녀노소 어우러질 수 있는 마인드라던지... 우리의 주관을 넣지 않고 객관적으로."


".... 맞네. 근데 나도 그걸 직접 그 친구한테 얘기한 건 아니고, 그 얘기를 할까 말까 생각하다가 왠지 '좋은 손님'이라는 그 단어가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은 안 했어."


"잘했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있잖아. 갑자기 툭 나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 늘 하던 생각이 말로 나오는 거야. 가끔 우리가 부딪힐 때도 보면, 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경향이 있긴 하잖아.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오기 쉬울 수도 있겠지? 아니면 단어 선택의 폭이 좁아서 실수처럼 들리는 일이 생긴다던가. 우리끼리는 괜찮은데 앞으로는 가게의 입장에서 타인한테 의견을 말할 때에는 우리가 서로 평소에 생각을 잘 공유해 두어야 할 거 같네.......(어쩌고저쩌고)"




이렇게 글로 쓰고 있자니 피곤하다. 남편은 얼마나 피곤할까.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도 있지. 그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나는 혼내려고 한 게 아닌데 어느새 남편은 내 눈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응시하며 입을 다물어 가고. 옆에서 그런 우리를 보고 있으면 웃길 거 같다. 나는 그저 뇌세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의견을 전달할 뿐인 건데. 그리고 뭔가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 이야기의 주제를 이어갈 뿐인 건데. 우리 대화 끝에 피곤한 건 늘 남편이고, 사과하는 건 늘 나다.



그래도 어쩌나. 서로 본인과는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결혼까지 했으니.


모든 면에 심각하지 않고 모든 면에 주저하는 남편이 있어 나도 중간에 숨이라도 쉬며 가는 거다. 남편이 없었더라면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복잡한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고, 어딘가로 늘 빠르게 달려가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생기는 문제와 과제들은 결국 내 머리를 터지게 하겠지.


그리 생각하다가도, 나와 핑퐁핑퐁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과 살면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같은 일을 하면 싸움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잘 조율(?) 중이다.

다음 주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바라는 것은 고성장도 고이윤도 아닌, 우리 부부의 정신건강뿐.




이전 03화코시카케야 단골손님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