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쓰'가 여행을 가면

by 연화

저는 소위 '알쓰'(알코올 쓰레기)입니다. 한 번이라도 술자리를 함께 한 지인들은 모두 저를 '알쓰'라고 기억할 정도니까요. 저는 술과는 영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입니다. 맥주든 소주든 막걸리든 알코올이 첨가된 음료라면 한 모금 마셔도 얼굴이 자줏빛 홍당무처럼 벌게지고, 그 이상 마시면 새끼발가락 끝까지 발갛게 달아오릅니다. 심장은 또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20살 첫 엠티 땐 아무것도 모르고 꿀꺽꿀꺽 술을 받아 마시다가 심장이 목에서, 귀에서 뛰길래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있고요.

무엇보다 술은 제게 '쓴 맛'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애기 입맛'이라던지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모르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네가 곱창을 싫어하는 것처럼 나도 술을 싫어하는 거야!'라고 되받아 치고 싶었지만.. 머쓱하게 웃기만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삼겹살엔 소주지!'라는 말엔 살면서 한 번도 공감한 적이 없고, '치맥'보다는 '치콜'이 좋습니다. '가볍게 맥주 한 잔 할까'에 설렌 적도, 기쁜 적도, 고민한 적도 없습니다. 치기 어렸던 이별의 아픔을 책임져주었던 동반자는 잠과 윤종신의 노래였지, 술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2017.10.12

일본 교토

kyoto_12.jpeg 일본 교토, 친구 A의 자취방 근처 이자카야에서

하지만 모든 여행이 나에게, 당신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돼 듯이, 여행지에서 마주친 술은 '알쓰'인 저에게도 활짝 문을 열어줍니다. 여행지에선 싫어하고 부정했던 어떤 것도 허용되는 것이죠.


낯선 외국어가 들려오는 이자카야에서 마셨던 맥주 한 모금이 참 시원하고 상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친구 A가 평소엔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고 있고, 저 역시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술의 쓴맛은 여전히 싫지만, 살짝 후덥지근한 공간에서 속에 있던 실타래들을 하나둘씩 꺼내놓게 만드는 그 힘은 도저히 싫어하거나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알쓰'가 어디 가겠냐고, 저 날도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했음에도 정수리에서 새끼발톱까지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겨우 이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부끄러워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숨기려 억지로 눈을 부릅뜨기도 했고요. 우리는 내리 두 시간을 떠들다 차가운 공기를 품은 교토의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래도 술기운에 조금 훈훈해진 입김을 후- 내뱉으며 빙글 도는 거리에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앞으로 1년 간은 쭉 교토에서 열심히 일할 A. 그녀와 언제쯤 다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눴던 우울하고 답 없는 이야기들이 아직도 술잔에 동동 떠 있는 것 같습니다.




2017.10.25

대만 타이페이

kyoto_12(2).JPG 대만 타이페이의 마지막 밤, 호텔에서

동기 B, C와 1년 전 외암리를 놀러 갔을 때 도수가 낮은 과일 맥주 한 캔을 먹고 잔뜩 취해버려서 놀림감이 됐던 기억이 있습니다. (CF처럼 예쁘게 홍조가 드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타이페이에서 보내는 여행의 마지막 날, 파인애플 맥주 3캔과 심사숙고해서 고른 안주들을 풀어놓으니 그때의 일이 생각나 모두가 웃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우리, 지금의 우리. 어쩌면 이렇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을 까요.


한국에선 친구들과 혹은 직장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늘 눈치를 보기 바빴습니다. 술을 못 먹는 게 민폐는 되지 않을까, 분위기를 흐리진 않을까, 실수하진 않을까.. 늘 고심 초사 했죠. 특히 회사에서 한참 막내 생활을 했을 때 회식이라도 잡히면 회식 2주 전부터 걱정이 돼 밤잠을 설치기도 했고요.

그런 제게, 여행지에서 가지는 술자리는 작은 일탈이기도 합니다. 여기 이곳이니까 괜찮아, 하고요. (물론 마지막 밤에도 맥주보다 안주를 더 많이 먹긴 했습니다.)


PS.

참, 술을 잘 먹는 게 부러웠던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동기 J는 술을 먹으면 기가 막히게 시를 쓰고 소설을 썼습니다! 맨 정신엔 절대 나올 수 없는, 술냄새 폴폴 나는 독특하고 멋진 글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문예창작과 학생들은 술을 가까이해야만 할 텐데요. (실제로 저희 과 친구들 대부분이 상당한 애주가들이었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원수의 별장을 방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