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대한 만족감과 끝없는 욕망
내가 제주에 집을 짓겠다고 하면 대부분 질문이 제주에 내려가서 살 것이냐고 묻는다. 아내 하고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가족 전체가 내려가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제주 공간은 일명 세컨드하우스로 자주 오가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길거리에 돈을 버리는 행위다. 전원주택이 얼마나 팔기 어려운지 아느냐. 두 집 살림은 비용이 두 배로 든다는 둥 걱정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에게 롤모델이 존재한다.
회사가 합병으로 판교로 옮기기 전 한남동에 있었는데 바로 직전 H대 서울캠퍼스에 일부 사무실이 있었다. 이곳에는 마케팅과 디자인 부서 등 말랑말랑한 부서가 있었는데 난 마케팅 직군이라 당시 새롭게 건축한 이 대학 건물에 입주했었다. 당시 상암동 쪽에 살고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어 개인적으론 만족스러웠다. H 대는 입점업체 직원들에게 교직원에 준하는 다양한 혜택을 주었는데 교수식당도 애용할 수 있고 체육시설도 이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 수영장을 입점업체 할인을 받아 이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운동을 마치고 수영장을 나오는데 도사 같은 직원 어르신께서 갑자기 말을 붙이셨다.
“자네 혹시 검도를 해 볼 생각이 있는가”
검도? 그렇게 나의 검도인생이 시작되었다. 이 대학 사무실은 그 후 회사가 한남동에 큰 건물을 임대하면서 양재동과 대학 사무실을 통합하여 모두 이전하게 되었지만 H대 교검회 인연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약 15년 이상을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교검회는 이 학교 교수 및 직원 등이 소속되어 매일 아침 합동 운동을 했는데 이곳에 건축과 교수님들은 물론 졸업생들도 있어 자연스럽게 건축을 접하고 이들과의 교류가 가능하여 나에겐 행운이었다. 나는 검도도 열심히 수련했는데 3단 승단 시험을 앞두고 회사에서 안식휴가 4주 동안 매일 수련하여 승단에 통과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회사 합병 후에도 거의 매일 운동하고 판교까지 출근하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는데 많은 사람이 놀라긴 했던 것 같다. 출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스러워서 가능했을 수 있다.
검도회 교수님들 중에는 세컨드하우스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이 분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언제나 부러웠던 것 같다. 특히 한 교수님은 서울, 강원도, 남해안에 개인 공간을 두시고 세 곳을 번갈아 다니며 생활하셨다. 미술을 전공하신 분 답게 세컨드하우스 모두 감각이 대단하였다. 내가 제주에 세컨드하우스를 짓는다고 하니 교수님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 본인의 세컨드하우스로 초대도 하셔서 가족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교수님은 “한 곳에서 사는 것보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곳에서 사는 삶이 나름 행복하다”고도 하셨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고. 커피 머신도 최소 4개 - 교수님 작업실도 따로 있으시다-를 갖춰야 하는 등 생활비가 최소 2~3배가 더 들기도 한다. 또한 몇 시간씩 운전을 하며 이동하는 것이 약간 부담이긴 하지만 -요즘엔 KTX도 잘되어 있어 자주 애용하신다고-언젠가 자율주행이 현실화되면 물리적 거리는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며 보다 만족할 만한 공간에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
특히 최근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고 있는데 강원도 용평은 서울보다 10도 이상이 온도가 낮아 미래의 주거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강원도의 자연환경과 평창 동계 올림픽 인프라를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는데 겨울엔 크로스컨츄리, 여름엔 골프 등 끊임없는 자기 수행이 가능하다고 자랑이 끊이지 않으셨다.
교수님의 남해안 주택은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집이다. 내가 전 세계에서 본 집들 중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교수님은 정원도 손수 가꾸시고 내부 인테리어 가구도 조립하시는 등 하루하루가 허투루 지나치는 날은 없어 보였다. 은퇴 후에는 더욱 집 가꾸기에 매진하고 계셨다.
“자네 제주 프로젝트 다음은 강원도 용평이네. 여름에 지낼 곳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공간에 대한 만족감과 끝없는 욕망.
어쩌면 나의 제주 프로젝트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