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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닝겐의 기계화

119일차

by 태희킷이지 Mar 05. 2017


2017. 1. 17.


오늘부터 3일간 알바를 하기로 한 공장이 애월이라고 해서 가까울줄 알았는데 버스로 가기엔 너무나 먼 곳이다. 그래서 살짝 고민했더니 그 부근에 사는 직원이 있다면서 출근길에 픽업해주신다고 한다. 설마설마 했는데 퇴근길도 데려다주신단다. 꺄오.


6시 45분에 눈을 떠서 어젯밤 주섬주섬 챙겨둔 고구마와 달걀을 우유와 함께 먹는다.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먹으려니까 고구마가 더욱 고구마처럼 느껴진다. 눈이 뻘개질만큼 기침을 참다가 우유를 급하게 마셨더니 이제는 딸꾹질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밤사이 차갑게 식어버린 치킨을 입에 물었다. 모든 것이 전보다 나아지는 듯하다.


이미 차 한대가 우체국 앞에 서있다. 똑똑 두드렸더니 인상 좋은 형님 한 분이 창문을 내리신다. 차를 타고 가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언론학도로서 현세태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차창 밖으로 떠오르는 해를 향해 눈길을 돌리면서 뉴스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조합해 무슨 말인지도 모를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런 질문은 듣기만해도 귀끝이 빨개진다. '언론학도로서'라는 말만 뺐어도 괜찮았을 질문인데. 

사무실에 들러 통장, 신분증 사본을 넘기고 3일간 공장에 출입할 수 있도록 출입문에 지문을 인식한다. 전에 입었던 사람의 체취가 가득한 유니폼을 받아 입었다. 바지는 발목이 드러날만큼 짧고 상의는 몸에 조금 붙는다. 슬리퍼는 당연히 발에 맞을리가 없다. 흰색 머리망을 뒤집어 쓰고 공장에 들어선다. 컨베이어 벨트가 이어지는 포장실에는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포장실과 칸막이로 분리된 준비실은 화장품을 대야째로 보관하는 창고와 이어져있다. 포장실이 어느정도 정돈되고 나니 알바들이 한 명씩 투입된다.


처음 하게 된 일은 탬핑 불량 때문에 다시 공장으로 돌아온 바디워시와 샴푸 뚜껑을 다시 손으로 꽉 조이는 일이다. 장갑을 끼긴했지만 요즘 다시 갈라지는 손가락 때문에 조금 신경쓰인다. 하지만 신경을 다른데로 돌릴 새도 없이 컨베이어 벨트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기계놈이 내 속도에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계놈의 페이스에 맞춰가는 그야말로 닝겐의 기계화 현장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트레드밀이랑 비슷하게 일단 내 몸을 기계가 원하는 리듬에 맞춰 놓으면 그 뒤로 큰 노력이 필요하진 않다. 하지만 단순히 반복되는 움직임은 잠을 소환해내고 결국 기껏 맞춰뒀던 몸의 리듬을 깨트린다. 그러면 외출했던 정신이 황급히 돌아와 깨어진 리듬을 되찾으려고 몸에게 다그친다. 몸의 리듬이 자리잡고 무너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과정이 공장 알바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두 번째 일은 비욘드 화장품 세트를 완성하는 일이다. 토너, 에멀젼에 에센스, 크림, 샘플까지 있어서 라인에 붙어 한명씩 붙어 구성품을 채워넣는다. 다른 구성품들은 비욘드라는 브랜드명이 앞을 보도록 맞춰놔야하는데 나는 뚜껑만 보이는 크림이라서 그냥 아무생각없이 크림이 들어가는 자리에만 쏙쏙 채워넣으면 된다. 개이득이다 ㄲㄲㄲ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끝나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더 페이스샵 화산토 라인의 화장품 박스를 접는 일이다. 본격적으로 라인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단상자'라고 부르는 이 작은 박스의 밑면을 끼워놔야 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완성된 화장품을 쏙 넣고 뚜껑을 닫아 6개들이 박스에 다시 포장할 수 있다. 하루종일 움직인 손목과 손가락은 삐그덕대는데 컨베이어 벨트는 여전히 건재하다. 기계 파괴 운동을 일으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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