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싶어 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결코 아름답게만
간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어떻게 이해했나요?
‘우리는 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싶어 한다.’
A : 역시 사람은 믿을 수 없어.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B : 내게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닐 거야. 그에게는 내가 보지 못한 많은 가능성이 있을 거야.
‘인간의 마음이란 결코 아름답게만 간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A : 그래, 겉으로는 고상해 보여도 저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온갖 나쁜 생각들을 하겠지.
사람이 다 그렇지 뭐.
B : 그래, 사람이 늘 선한 마음만 품을 수는 없지. 종종 나쁜 마음도 가질 거야.
마찬가지로 사람이 늘 나쁜 마음만 품을 수도 없어. 그도 선한 마음을 품을 때가 있겠지.
A는 사람은 믿을 수 없으며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존재라며 단정 짓습니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B는 사람의 마음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음을 이해하고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읽었나요?
김종원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제나 속마음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건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를 수 있으니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심연을 들여다보라는 말이다.’
‘자신의 눈과 귀, 마음을 열어야 세상을 느낄 수 있다. 그게 아니면, 100년을 살아도 하루를 100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하루를 100년 반복하지 않고 온전히 100년의 다채로움을 느끼며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눈과 귀, 마음을 열수 있을까요?
에디슨은 전구의 필라멘트를 개량하기 위해서 13개월 동안 6,000여 종이 넘는 재료를 사용했고, 7,000번 이상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는 성공하지 못한 10,000번의 방법을 찾은 것뿐이다.’
에디슨은 ‘실패’라는 말 대신에‘성공하지 못한 방법’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실패라는 말속에는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닫힌 언어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방법을 찾았다’는 말에는 다른 방법을 시도한다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가능성의 언어, 열린 언어입니다.
나는 나의 언어로 나의 세상을 하나하나 쌓아갑니다. 내가 가능성의 언어, 열린 언어를 사용해야 세상도 나에게 가능성의 문을 열어줍니다.
“나는 안 되나 봐.”
종종 제 자신을 향해서 던지는 말입니다. 전형적인 닫힌 언어입니다. 이 말을 가능성의 언어로 바꿔봅니다.
“아직은 안 되네.”
“여기서는 안 되네.”
“이렇게 하면 안 되네.”
내가 안되는 게 아니라, 내가 시도했던 그 방법이 지금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시기나 환경이 적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더 시도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항상 한 번 더 시도하는 것이다.'
두드려야 문이 열리는 것처럼, 시도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99도, 물이 끓기 직전일 수 있으니까요.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코이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에 넣어두면 15∼25cm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강에서는 90∼120cm까지 성장합니다. 같은 물고기인데도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가 되고, 강물에 놓아기르면 대어가 됩니다.
코이처럼 나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진짜 나쁜 사람이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가끔 상대에게 이런 마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전형적인 닫힌 언어입니다. 이 말을 가능성의 언어로 바꿔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지금 나는) 속상해.”
“그렇게 행동하면 (지금 나는) 화가 나.”
상대의 존재 자체를 단정 짓는 말 대신에, 내게 했던 상대의 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춰봅니다. 지금 느껴지는 내 마음에 초점을 맞춰봅니다. 상대방도, 나도 늘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다시 한번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지금 나는 모르지만)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난 안돼.”
“난 OO야.”
“너는 OO한 사람이야.”
“세상은 원래 OO야”
이와 같이 닫힌 언어는 우리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듭니다. 우물 속 세상에서 100년을 살면, 하루를 100년 반복한 것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넓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나도, 당신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가능성의 문은 늘 곳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아주 일부분만을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정말 좋은 일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안 되었다고 내일도 안 되라는 법이 없고, 오늘 알고 있는 사실이 내일 바뀌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항상 가능성의 문을 열어둡니다.
벽을 무너뜨리면 다리가 됩니다.
가능성의 언어는 그 첫걸음입니다.
사람마음 알수없어
보이는게 전부아냐
전부예쁜 사람없고
전부미운 사람없네
가능성을 열어둬야
진짜모습 볼수있네
닫힌언어 사용하면
가능성도 같이닫혀
열린언어 사용해야
가능성도 열린다네
나는안돼 말하지만
지금잠시 안될뿐야
여기서만 안될뿐야
이방법이 안될뿐야
코이라는 물고기가
신기하기 짝이없네
어항에선 피래미나
강에서는 대어라네
나도너도 코이처럼
어찌될지 모른다네
변화하는 세상에서
뭐가정말 좋은건지
뭐가진짜 가능한지
지금나는 알수없어
닫힌언어 사용하면
생각마저 닫혀버려
가능성이 사라지고
좁은세상 살아가네
단단한벽 무너지면
튼튼다리 되어주어
넓은세상 열어주니
열린언어 열어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