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산다면,
세계도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꾼다면,
세계도 그에 맞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 자신의 수준이 곧 당신이 만날 세계의 수준이다.
- 비트겐슈타인
인생은 B(birth, 태어남)와 D(death,죽음) 사이에서 있는 C(choice, 선택)이며, C를 만드는 것은 A(awareness, 알아차림)라는 이야기를 지난 포스팅에서 했습니다.
오늘은 알아차림을 통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면,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먼저 옛날이야기 한 편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며느리의 행동에 트집을 잡고 괴롭혔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참다못한 며느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지난 10년을 참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저는 이제 단 하루도 시어머니랑은 못 살겠어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점쟁이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내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할 수 있겠나?”
“예,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니 제발 방법만 알려주세요.”
“시어머니가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해?”
“시루떡이면 사족을 못 쓰시죠.”
“그럼 100일간 매일 시루떡을 쪄서, 따끈따끈한 시루떡을 정성스럽게 시어머니께 드리게.
그렇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100일간 드리면, 100일 후에 시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나실 거네.”
무당의 말을 들은 며느리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성스럽게 시루떡을 만들어 시어머님께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을 보면 항상 인상만 쓰던 며느리가, 별안간 방긋방긋 웃으면서 따끈따끈한 시루떡을 주니 의심이 들었습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구나 싶어 며느리에게 욕도 하고, 타박도 했지요.
아무리 타박을 해도 며느리가 인상을 쓰기는커녕, 방긋방긋 웃으며 따끈한 시루떡을 매일 같이 주니 점점 시어머니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며느리 칭찬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시어머니는 며느리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100일째 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루떡을 가져온 며느리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가, 그동안 많이 섭섭했지.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참 많이도 했다. 내가 미쳤지. 너처럼 고운 아이가 어디 있다고… 아가, 이 못난 시 어미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사실 며느리도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시어머니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거든요.
며느리도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동안 제가 많이 부족했어요. 이제부터는 어머님께 더 잘할게요.”
그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어머니와 헤어진 며느리는 점쟁이가 말한 100일이 된 것을 뒤늦게 떠올렸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며느리는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챙겨 점쟁이에게 부리나케 뛰어갔습니다.
“아이고, 도사님 제가 미친년입니다. 제발 저희 시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방법만 알려주시면 이 패물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제발 저희 시어머니 좀 살려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사정사정하는 며느리를 보며 점쟁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미운 시어머니는 이미 죽었지?”
시어머니를 대하는 며느리의 태도가 변하자 시어머니도 변했습니다. 미운 시어머니는 사라지고, 따뜻하고 자상한 시어머니가 새로 생겼습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꾼다면, 세계도 그에 맞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세상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나에게 돌려줍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사랑을 보내면 사랑이 돌아오고, 미움을 보내면 미움이 돌아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반드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내면 사랑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반드시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내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설혹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이미 내 마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말처럼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반드시 내가 미워하는 상대에게 어떤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그 순간, 내 마음에 증오와 분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상대를 찌르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상대를 찌르기도 전에 이미 내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내가 좋고, 미워하고 내가 힘듭니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해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주 분명하고 간단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다른 과녁을 향해 총을 쏘는데 나의 과녁에 맞을 수는 없듯,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하기 어렵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미운 마음이 드는 까닭은 내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선이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
직장 상사와 갈등이 몹시 심했습니다. 상사는 사소한 일로도 트집을 잡아 저를 괴롭혔습니다. 화가 난 저는 일부러 미운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점점 커져가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문득 저 자신을 봤습니다. 세수를 하는 그 순간에도 저도 모르게 직장 상사 생각을 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드니 굳은 얼굴, 부릅 뜬 눈, 악다문 이를 한 제가 거울 속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낯설고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아침 출근을 준비하는 그 바쁜 시간에도 미운 사람을 생각하며 나를 지옥 속에 밀어 넣고 있는 스스로가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결국 괴로워집니다. 상대 또한 괴로워질 확률도 높아지겠지만, 나는 반드시 괴로워집니다.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미워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시선을 돌려 제 자신을 봅니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할 때 나의 표정과 몸, 나의 마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해지는 충분히 느껴봅니다. 지구 저 편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해도, 내 마음은 지금 즉시 따뜻해집니다.
시선을 자신으로 향해 봅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자신의 표정과 몸, 마음이 어떤지를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나의 몸이 얼마나 긴장하고 나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워지는 잘 살펴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즉시 내 몸과 마음이 얼마나 괴로워지는 충분히 느껴봅니다.
이렇게 시선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리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라고 해도 미워하기가 힘듭니다. 맛있는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해도 자꾸 손이 가는 것처럼요.
사랑은 희생도 아니고 이타적인 행위도 아닙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지혜로운 행위이며, 미움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지혜로운 이에게는 선물을 안겨주고, 어리석은 이에게는 고통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나의 모든 현실은 내가 원한 것들로 채워집니다.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지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합니다.
이세상은 거울같아
나의모습 비춰주네
사랑주면 사랑오고
미움주면 미움오네
누군가를 사랑하면
보낸사랑 돌아오네
사랑할때 이미내맘
사랑으로 충만하네
누군가를 미워하면
보낸미움 돌아오네
미워하는 그마음이
이미지옥 속에있네
타인아닌 나에게로
시선방향 돌려보면
사랑할때 몸과마음
따뜻해져 내가좋고
미워할때 내힘든줄
자연스레 알게되니
사랑하지 말라해도
사랑하게 되어있고
미워하라 권하여도
미워하지 않게되니
나에게로 시선돌려
지혜로운 선택하면
이세상이 나를향해
선물가득 안겨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