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월셋방에 삽니다
명절에 집에 다녀온 친구가 친오빠 내외와 조카를 만났다고 했다.
조카에게 크게 선물을 뜯긴 후, 조카와 친해졌는데,
친구의 친오빠가 조카에게 '고모'네 집에 놀러가자며
"고모, 몇 평에서 살아요?"
하고 물었다.
친구는 속으로 아직 단칸방에 사는데 몇 평은 무슨 몇 평이냐고 투덜댔다.
나는 사실 다시 자취 물품을 살 지 몰랐다.
결혼을 생각하던 남자친구가 있었고,
서로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이었다.
마침 그 때 나는 본가에 내려가 있었고,
서울에 올라오면 당연히 신혼집이 내 다음 집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 식장 들어갈 때까지 모른다더니,
결혼얘기를 하다가 크게 다투었다.
그렇게 몇 년의 만남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다시 서울에 오게 되었을 땐,
새롭게 터전을 구해야 했다.
그전에는 직장 근처, 학교 근처에 살았다.
처음에는 상경인들이 많이 산다는 서울대 입구에서 살았다.
집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세가 비쌌다.
거기서 우울증만 크게 얻고 본가로 내려갔다.
두번째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살았다.
직장과 학교의 중간쯤이었는데,
집 컨디션도 좋고, 조용해서 좋았다.
역에서 집가는 길에 맛집들도 많았고,
친구들을 만나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학교 근처로 집을 옮기게 되었다.
세번째 집은 상도였다.
학교 근처여서 살았는데,
주변에 갈만한 식당이나 편의시설이 없었다.
또한 집주인 아저씨가 이상하게 간섭하고,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기까지 하여서 이사했다.
그리고 네번째는 기숙사였다.
지난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커서
원룸을 더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기숙사에 신청했고,
원룸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은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
기숙사는 룸메이트가 한 명 있다는 거 빼고는
원룸보다 훨씬 질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바로 1층에는 학식이 있었고, 편의점도 있었다.
교실도 가까웠고, 방도 크고 넓었다.
그러나 졸업을 하면서 기숙사에서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신혼집을 구하게 될 거란 생각과 달리
다시 원룸을 찾기 시작했다.
직장도, 학교도 없는 나는 동네를 고르기가 더 어려웠다.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동네를 골랐다.
아, 그 동네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 동네가 내가 살 곳이구나, 했다.
큰 도로와 깨끗한 거리, 많지 않은 사람.
내가 늘 살던 동네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동네가 좋으니, 집값이 더 비쌌다.
크지 않은 집도 월세가 1000-60정도 했다.
월세를 낮추기 위해서 보증금을 올렸고,
몇주를 돌아다닌 결과 다행히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나같은 백수에게 돈을 빌려줄 곳은 없었기 때문에
엄마아빠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보증금을 마련하고,
집을 계약했다.
그렇게 나의 작고 깨끗한 집을 마련했다.
집을 구하면서 이 작은 단칸방 하나도 내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 웃펐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올라오는 내 자신이 미안했다.
언제 부모님에게 빌린 돈들을 다 갚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언제 내가 이 단칸방을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서른 넷 언저리의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집에 산다.
그들 역시 매번 그 집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은행의 집이라고 한다.
은행집이라도 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최근 들어 우리는 그런 얘기를 더 자주한다.
투룸으로 갈 수 있을까, 소망은 더 소박해지고,
전세값은 우리가 따라 잡을 수 없이 올라간다.
대출도 막혀서 우리는 청약을 해도 중도금조차 낼 수가 없다.
친구는 우리를 '서울 거지'라고 부른다.
서른 넷, 어른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