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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Mar 31. 2021

장애인 업체는 왜 갑질을 하는가?

제목을 바꿔보았다. 사실 초심을 잃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혼자만의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실장 몇 번째 이야기로 고집해왔는데, 무언가 신선한 스스로에게 새로운 무언가가 글쓰기에도 필요한 것 같아서 제목을 바꿔보았다. 그런데 그 제목이 조금 자극적이다. 사실 조금은 감정적이고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한 글이고 제목이기에 사실 읽는 분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가식적인 글보다는 솔직한 글이 더 와 닿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진행하고자 한다.



전화가 울린다. 번호가 낯익지 않다. 그래서 받는다.


"안녕하세요. **초등학교 행정실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십니까. 수고 많으십니다."


아, 망했다. 평소 얼굴은 잘 기억 못 해도 목소리는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나는 정말 저 두 마디에 촉이 딱 왔다. 그분이다. 그분. 중증장애인 업체 사무국장님. 벌써 세 번째 전화이다. 그렇게 내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했는데도 또 전화를 하신걸 보면 그 의지만큼은 높게 산다지만 딱 거기까지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도대체 왜 이러세요. 전화 그만하세요. 제가 필요하면 연락드린다고 했잖아요!"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공무원이고 그는 넓은 의미의 민원인이다. 공무원은 민원인에게 절대적인 을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끝까지 차분하고 말 한마디 허투루 하면 안 되고, 최선을 다해 친절해야 한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실장님 4월이 장애인의 달입니다. 장애인의 달을 기념해서 학교에서 저희 장애인들이 생산한 상품을 좀 구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만드는 건 종이컵 핸드타월 물티슈 비누......" 똑같은 레퍼토리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학교에 전화를 해서 저 멘트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해온 걸까.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제가 필요한 게 생기면 연락을 드릴게요. 지금 당장은 불러주신 것 중에 저희 학교에 수요가 있는 물품이 없어요." 평소 발음 정확하기로 주변에 평이 자자한 나는 더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는 지지 않는다. "4월이 장애인의 달이에요. 장애인의 달을 기념으로 하나 사주시면 정말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안 필요해도 지금 불러드린 물품들이 유통기한이 짧은 것도 없고 미리미리 사두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기가 찬다. 진짜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그렇다고 나 역시 지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면 정말 귀찮아서 하나 사주고 말겠는데, 이건 나랏돈이다. 아니 정말 민망하지만 거창하게 말하자면 국민들의 돈이다. 국민들의 돈! 나. 랏. 돈.!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필요한 거 생기면." 짧게 말하고 침묵을 지킨다. 청산유수였던 그도 내 침묵 앞에서는 답이 없나 보다. 알았다는 아주 아주 정말 아주 아주 떫떠름한 말을 남기고 전화가 끊긴다. 하.. 또 한 번 잘 넘어갔다.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세상 차갑고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지 잘난 공무원 일 것이다. 그래서 해명을 해보려 한다. 해명이 통해서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고 엄청난 욕을 먹는다고 해도 나는 갑질 하는 장애인 업체에 휘둘리는 그런 공무원은 되지 않을 것이다.


신규 시절의 일이다. 조용한 행정실에 누군가 조용히 들어왔다. 나이 지긋이 든 할아버지였다. 자기소개도, 통성명도 없이 실장님께 직행한 그는 팸플릿을 하나 내놓더니 이거 이거 가리키며 하나 사주십시오 했다. 그때 실장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완전 짜증 나는데 난감한 표정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실장님께서는 연륜이 있어서였는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보셔서 그런 건지 아주 완곡하게 거절을 하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강적이었다. 갑자기 행정실 민원인 접대용 의자에 앉아서는 좀 쉬었다 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결국 실장님은 부장님을 통해 할아버지가 지목했던 제품을 십몇만원 어치 사주셨다. 신규여서 바짝 얼어있던 나는 갑자기 몸이 녹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사실 떼쓰는 아이처럼 드러눕지 않았을 뿐 그 자리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야 말고 갑질 아니고 뭐였을까. 정말 나처럼 약간 똘끼 있는 실장이라서 끝까지 안 사줬으면 그 할아버지는 과연 퇴근시간까지 앉아있었을까. 아니면 장애인들이 좀 살아보겠다는데 그거 얼마나 한다고 안 사주냐고 박박 소리라도 지르고 행패를 부렸을까? 진짜 무려 6-7년 전 일인데 또다시 속에서 천불이 난다.



이런 일은 또 있었다. 이건 내가 8급 때 일이다. 조용한 사무실에 누가 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내 직감은 딱 들어맞았다. 바로 실장님 자리로 직행한 그 아저씨는 무슨무슨 말을 하는데, 정확하게 멘트는 기억이 안 나지만 여하튼 엄청 장황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실장님은 한동안 듣고 계시다가 부장님을 불러 예산이 있는지 확인하시고(나는 그때 발칙하게 생각했다. 나 같으면 예산 없다고, 사려면 추경해야 한다고, 그런데 어디서 긁어서 추경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결국 또 이미 학교에 가득가득 쌓여있는 화장실용 큰 동그라미 휴지와 갑 티슈를 몇 박스 사주셨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내가 실장 자리가 되면 나는 절대 수요가 없는 갑질에 의한 장애인생산품 구매는 하지 않겠다고. 



이런 안 좋은 경험들이 쌓인 채 나는 어쩌다 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실장 된 지 7개월 만에 마주하게 되었다. 똑같은 상황을. 물론 코로나 상황으로 그분들은 대면한 건 아니지만, 세 번의 전화를 받았고 세 번의 강압적 권유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무례하지 않고 똑 부러지게 내 의견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많은 공공기관들은 타의적으로 중증장애인 생산품을 구입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 특별법으로 인해 한해 기관의 물품구매 소요액에 1%를 구매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2020년 반년 동안 복사지, 핸드타월, 물티슈, 토너 등등 수요가 있을 때마다 학교장터를 통해 중증장애인 상품을 참 많이도 구매했다. 사실 수요보다 좀 더 넉넉하게 구매했고,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학교에서는 수요가 생길 수 없는 상황이다.


*학교장터: 지정정보처리장치, 행정안전부 지정고시, 교육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를 위한 전자조달시스템


그런데도 1%라는 목표치가 마음 한편을 참 무겁게 한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공생이란 무엇인가? (중증장애인생산품 구매에서 공생까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는 게 바로 내 모습이 아닐까.)

나도 안다. 장애인 분들은 상대적으로 비장애인들보다 판로를 구하기도 힘들 것이고, 장애인에 대한 근거 없는 선입견들이 아직까지 사회에 남아있어서 판로를 개척한다 해도 그것을 수익으로 실현시키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도 엄연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 같이 공생해야 하기에 법까지 만들어서 공공기관이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 왜 자꾸 그들에게는 무기가 되고, 공공기관에게는 마치 그들이 무기를 넘어 흉기를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1%를 채우기 위해 공공기관은 창고가 미어터지고, 숙직실도 발 디딜 틈도 없고, 행정실 교무실 할 것 없이 유휴공간이란 공간은 다 동원해서 그들의 물건을 사야 할까? 정말 씁쓸하고 아이러니하다.


나는 안다. 나는 현재 시골학교에서 일하고 있고, 그 동네가 유난히 좁아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 학교 새로 온 행정실장이 장애인업체의 판매권유를 세 번이나 아주 매몰차게 거절한 아주 싹수없는 인간이라고 소문이 나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알까. 그 전화를 끊고 나서 다른 일로 행정실을 방문한 교무실무사님께 혹시 이 물품들 중에 우리 사야 할 거 있냐고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본 것을. (안타깝게도 그녀의 답은 '없습니다'. 였다.)


  


선뜻, 아주 흔쾌히, 즐거운 마음으로 중증장애인생산품을 사주지 않았던 한 때 함께했던 (앞에 언급한) 실장님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분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갓 공직에 발을 들인 신규가 강매에 속수무책 없이 학교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는 동안 그분들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짱짱 히 살아있는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 구매율 1%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줬을까, 아니면 옥죄였을까.


아직도 어정쩡한 경력을 가진 어리바리한 초짜 실장이지만, 그래도 손하나 다 핀 것보다는 세월이 흐른 탓일까 지금의 나는 그분(앞에 언급한 실장님들)들을 조금은 이해한다. 공생이라는 큰 틀 안에서 공무원이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매몰차게 하기란 정말 어려우니까. 그러는 나는? 아직 3월이다. 4월이 되고 5월이 되고, 회계마감을 해야 할 내년 2월까지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물티슈고 복사용지고 핸드타월이고 수요가 생기기 마련이고, 하다못해 믹스커피라도 둥굴레차라도 수요가 생기면 내가 먼저 전화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층층이 쌓여있고, 빼곡히 차있는데 무리해서 구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무국장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학교장터로 다른 업체에 구매할 가능성이 더 높다.)



ps. 사무국장님이 4월 되었다고 다시 전화 안 하면 좋겠다.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듣기 싫다는데, 거절하는 말을 세 번 이상 하는 나는 마음이 편하겠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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