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Aug 15. 2022

저.. 저 좀 도와주세요!

셀프주유 도전기(1)

남편의 근무부서가 바뀌면서 출장이 많아졌어요. 근무시간 내 출장은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외부에서 1박을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는 거죠. 이틀, 혹은 삼일 연속을 퇴근해서 아이들을 온전히 육아한다는 자체도 힘들었지만 남편이 없는 집에 애들 데리고 밤에 잔다는 게 생각보다 무섭더군요. 그런데 여기에 보태서 진짜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그 얘기를 해보려고요.  

     

언젠가 남편이 출장이 있어 타 지역으로 떠나기 전날 퇴근길에는 분명 생각했어요.     


"꼭 넣어달라고 해야지. 꼭꼭.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 아이들 하원 시키면서 유치원 선생님과 어린이집 선생님께 그날 하루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들은 얘기를 아이들의 입을 통해 또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엄마들 만나서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죠. 남편이 퇴근한 이후로 계속 남편과 같이 있었는데 그 얼굴을 몇 번을 보면서도 생각해내지 못했어요. 더 기가 막힌 건 그다음 날(즉 당일날) 아이들을 다 걸어서 등원시키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을 때까지도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거예요.

     

시동을 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너무도 선명한 네 글자 덕분에 말이죠. 연. 료. 부. 족.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이 예쁜 주황색의 동그라미에 불이 들어왔어요. 이럴 수가. 그렇게 잊어버리지 말자고 되뇌었건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 진짜 기억력을 다 길바닥에 뿌린 거야 뭐야. 이미 아이들과의 아침 전쟁으로 기운이 빠질대로 빠졌는데 순식간에 덮쳐오는 스트레스로 뒷골이 당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출근을 안 할 수 있나요? 그리고 이미 연료 부족 상태는 여러 번 경험해서 출근까지는 걱정 없겠다는 판단하에 출발했어요. 그리고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 빠른 속도로 깜박이는 주황색 동그라미. 이제 진짜 연료가 바닥을 보인다는 신호였죠. 한숨이 절로 나왔어요. 출근을 하긴 했는데 퇴근을 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주유를 해야만 했고, 그건 학교 앞 기름값 비싸기로 유명한(타 주유소에서 기름값 1800원 하면 2천 원 하는) 모 브랜드의 주유소가 될 것이 분명했거든요.      


겨우 출근을 했을 뿐인데 이미 하루를 다 보낸 듯 너무 지쳤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무실로 들어가면 당장 처리하라고 쌓여있는 업무들 덕에 다시 에너자이저가 되지만요. 오전 내내 정신없이 일하고, 점심 먹고 또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다가왔어요. 내가 최소 몇천 원은 남들보다 더 지불하고 기름을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8시간 다시 만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한숨이 절로 나왔어요.      


무거운 마음으로 출발해서 도착한 주유소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요. 기도 안차서 기름값이 기억이 나요. 1999원. 기름값이 서서히 오르던 차여서 1900원까지는 봤어도 1999원은 정말 처음 보는 숫자라서 아주 잠깐이지만 내 운을 시험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니까요. 무슨 소리냐고요? 운이 좋으면 이 깜박이는 주황색 등을 보며 집까지 가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는 거죠. 이미 한번 운을 시험했다가 긴급출동을 불러본 전력도 있으면서.      


"3만 원이요."     


남들은 만원도 당당하게 주유한다는데 차마 목구멍에서 "만원이요."는 안 나오더라고요. 카드 영수증과 함께 아저씨께서 정말 주유소에서만 볼 수 있는 까끌까끌한 엠보싱이 가득한 휴지를 주시는데 전혀 고마운 마음이 안 들었어요. 차라리 기름값 1원이라도 낮춰주지. 하는 철없는 마음만이 가득했죠. 그렇게 아주 비싼! 기름을 넣고 출발하는데 이제 진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셀프주유 그까짓 거 내가 한번 해보자!!!!!!!!!!!!!!!!!!!      


셀프주유를 해본 적은 없지만 셀프주유소가 어디 있는지는 몇 군데 알고 있었기에 그곳을 목표로 삼고 달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입장한 셀프주유소. 이미 간판을 본 순간부터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어요. 그런데 하필 퇴근시간이라 줄 서있는 차도 많고, 셀프주유소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직원분들도 많이 나와계시더라고요. 아주 타이밍을 잘못 잡아도 제대로 잘못 잡은 격이죠. 그래도 이미 들어선 길, 근처에라도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조심조심 입장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저의 차례. 심호흡 한번 하고 내려서 터치터치터치, 어찌어찌 카드까지 잘 끼웠는데 응?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마주했어요. 바로 제 차의 주유구 여는 법을 몰랐던 거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그동안은 남편이 계속 주유를 해주기도 했고, 제가 했다 하더라도 저는 운전석에 붙박이처럼 앉아있었을 뿐 주유는 직원분이 해주셨으니 그동안 단 한 번도 제 주유구를 열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정말 극도로 당황한 초보운전자. 주위를 둘러봤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다들 자기 차 주유하고 빠지기 바빴으니까요. 그래서 서둘러 사무실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죠.     


"저.. 저.. 죄송한데.. 저 좀 도와주세요!"     


저만큼이나 당황하신 듯한 캐셔 아주머니께서는 물으셨어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니.. 제가.. 초보운전인데.. 셀프주유소를 처음 와봐서..."     

"아, 제가 해드릴게요."     


당황한 마음에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저와는 달리 금세 상황 파악이 되신듯한 아주머니께서는 성큼성큼 제 차로 다가가셔서는 주유구를 보시더니 요렇게 조렇게 눌러보셨어요. 그랬더니 열리더라고요. 그리고는 어떻게 주유하는 건지 친절하고도 재빠르게 알려주시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셨어요. 분명 배운 것 같은데 머릿속에 아무것도 안 남은 것 같은 상태로 겨우 주유구를 닫고 집으로 출발하면서 생각했죠.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 이후로 다시 제 차의 주유 담당은 남편이에요. 글을 한편 한편 써가며 생각해보니 제 남편에게 많이 고마워지네요. 아이들 다 재우고 나서 귀찮을 만도 한데 밤에 묵묵히 제 차키를 들고 주유소에 다녀와주곤 했거든요. 가끔 남편도 그냥 잠들어버린 날은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새벽같이 주유해주러 나가기도 했었어요. 이런 남편을 위해서라도 주유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진짜 매번 기름 칸이 줄어들 때마다 했던 것 같은데 이 날 이후로는 엄두조차 나질 않았어요. 그날, 그 당황스러움과 무력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제와 서야 처음부터 남편에게 주유를 온전히 의지해온 제 자신이 후회가 돼요. 애초에 스스로 주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주 용을 써서 배우고 말았을 텐데 아주 든든한 뒷백이 있었으니 절실함이 없었던 거죠. 2년 동안, 스스로 주유한 게 열 번도 안된다고 하면 믿어지시나요? 그걸 이 미련한 제가 해냈습니다.(ㅡㅡ) 무엇이든 제대로 배우거나 익히려면 역시 스스로 해봐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몸소 깨달았어요.      


하... 이제는 셀프주유 트라우마까지 생겨버린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아마 다음 글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전 06화 회식의 자유를 달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