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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Aug 19. 2022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셀프주유 도전기(2)

(광복절 때 이야기입니다.)     


며칠 전 집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익숙한 주황색 불이 켜지더군요. 안 그래도 이제는 정면돌파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잘 됐다 싶었죠.     


"너 마침 잘 만났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갈대 같은 게 두 눈을 부릅뜨고 연료 부족을 뜻하는 주황색 불을 뚫어지게 볼 때는 당장이라도 셀프주유소로 갈 것 같은 자신감이 분명 가득 찼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차에서 내리자마자 불안감이 덮쳐왔어요.     

할 수 있을까?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언제 가야 할까? 저번처럼 사람 많을 때 가면 시작도 못해보고 폭망인데..
주유구 여는 연습 좀 해보고 갈까?
카드는 미리 꺼내놔야 하나?     

불안감이 차츰차츰 잠식해나가고 있는 상태로 집에 들어서니 남편이 보였어요. 그리고 결심했죠. 그래, 처음에는 남편이랑 가보자. 주유하는 건 내가 해도 남편이 같이 있어주면 심적으로라도 안정이 될 테니까. 그리고 결심한 지 며칠 뒤인 바로 오늘! 진짜 출동했어요.     


가족들에게는 친정집에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고 셀프주유에 다시 한번 도전하겠다는 의도를 꽁꽁 숨긴 채 온 가족을 차에 태우고 출발했어요. 언제나 그랬지만 아이들은 차만 타면 흥분을 해요. 어쩌면 집이 아닌 다른 곳을 간다는 자체만으로 더 마음이 붕붕 뜨나 봐요. 첫째가 타고난 큰 성량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 둘째도 따라 부르면서 금세 차 안이 클럽 못지않게 시끄러워졌어요. 트라우마라고 한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셀프주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저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기에 아이들의 노래가 아주 시끄럽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외쳤죠.     


"엄마 운전하고 있잖아. 조용히 좀 하자!"     


아이들은 평소와 다른 모습의 엄마가 이상했는지 바로 목소리를 낮췄어요. 만족스러울 만큼 조용해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미리 꺼내놓은 결제카드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죠. (맞아요. 또 허둥지둥할까 봐 집에서 나오면서 지갑에서 일부러 카드 먼저 꺼내서 기어 앞에 빈 공간에 넣어놨어요.ㅠㅠ) 셀프주유소로 가는 길은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처음 가보는 곳도 아닌데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아주 낯설게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남편이 조수석에 앉아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몰라요. 심적 안정을 얻으려고 데려 온 남편인데 저도 모르게 운전면허 시험에서 만났던 감독을 다시 앉혀놓은 듯한 기분까지 들었어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제 운전이 마땅치 않았는지 여기서 멈춰라 여기서 끼어들어라 간섭하기 시작했죠. 평소 같으면 아주 불꽃 튀기는 티키타카가 몇 번은 오갔을 텐데 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저 듣기만 했어요.      


이미 출발할 때부터 연료 부족 경고등이 깜박거려서 아~주 자연스럽게 장한 셀프주유소. 주말이라 그런지 한산하더라고요. 조금 마음이 놓였어요. 주유기 앞에 주차를 하고 시동까지 완전히 끈 다음에 같이 내리려는 남편에게 말했어요.     


"있어봐, 내가 먼저 해보고 안 되는 게 있으면 부를게"     


그리고 내려서 바로 화면 앞으로 갔어요. 저번처럼 당황하지 않기 위해 주유구부터 열고 화면 앞으로 갔죠. 주종을 고르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이런 멘트가 나왔어요.     


"정전기패드에 손을 대세요."     


응? 뭐? 정전기 패드? 그게 뭐야? 아무리 주유기를 샅샅이 둘러봐도 정전기패드라는 건 보이지 않았어요. 다시금 극도로 당황한 저는 결국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죠. 그 전에는 분명 화면은 무사통과였던 것 같은데 그새 새로운 게 생겼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남편이 어떤 손바닥 모양 같은 패드를 가리켰어요. 차분히 다시 보니 "주유를 하기 전에 손을 대세요."라고 쓰여있더라고요. 많이 해본 분들이야 눈 감고도 손을 대겠지만, 저처럼 몇 번 경험이 없거나 아예 처음 셀프주유를 해보는 사람들을 정전기 패드라는 자체를 모르니 문장 위에 "정전기 패드"라고 쓰여있었다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그렇게 정전기패드를 지나 신용카드까지 잘 집어넣고 주유건을 주유구에 넣었는데.. 응? 기름이 안 나오는 거예요. 다시 당황한 저를 보며 남편은 손잡이를 잡아당겨야 한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래서 손잡이를 잡아당기니 그제야 주유가 시작되더군요. 그런데 손잡이를 계속 들고 있는 저를 보며 남편이 다시 말을 꺼냈어요.     


"여기 손잡이 밑에 있는 핀을 세우고 손잡이를 놓으면 고정이 돼"     


그런데 너무 긴장한 저는 핀을 세우라는 말밖에 못 들어서 핀을 세우려고 하는데 이게 안 세워지는 거예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짜증이 확! 나려는데 저보다 훨씬 더 차분한 남편이 다시 말을 해주었어요.     


"핀을 세우고 손잡이를 놓아"     


그제야 손잡이를 놓으라는 말이 들리더군요. 그래서 핀을 세우는 동시에 손잡이를 놓았더니 진짜로 제가 잡지 않아도 주유건이 고정되더라고요. 신세계였어요. 그리고 동시에 첫 셀프주유 도전을 했을 때 저를 도와주셨던 아주머니께서도 이 방법을 알려주셨던 게 그제야 기억이 나더라고요. 할 줄만 알면 별것도 아닌 건데, 그 사소한 것들이 너무도 크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어요. 저에게는 셀프주유의 모든 절차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주유가 끝나고 주유건을 제자리에 놓고 카드와 영수증을 챙겨 운전석에 앉으니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듯이 몸에 기운이 쫙 빠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머지 운전은 남편에게 부탁했답니다. 셀프 주유를 성공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또 실패했다고도 애매한 그런 날이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어요. 그동안 한 번의 실패로 너무도 짙게 저에게 드리웠던 셀프주유에 대한 트라우마가 조금 깨졌다는 것이죠. 완전히 정복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었겠지만 이 정도라도 만족해요. 마음속에 다음번에는 진짜 혼자서도 주유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다시 한번 싹을 틔우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그날따라 남편이 회전을 너무 좁게 도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무심코 한마디 했죠.      


"그렇게 회전을 해도 되는 거야? 너무 좁은데"     


그랬더니 바로 날아오는 반격의 한마디.     


"어이구~오늘 셀프주유 처음 해보신 분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약이 바짝 올랐지만 사실은 사실이니 그냥 넘어갔어요. 그리고 도착한 친정집에서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했어요.     


"엄마엄마! 나 이제 혼자서 주유할 수 있을 것 같아!"


"참나 아주 대단한 거 해내셨습니다~!"     


어째 오늘따라 제 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죠? 뭐 그래도 괜찮아요. 남들이 제 도전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저는 제 자신이 엄청나게 기특하니까요. 그동안은 무엇이 되었든 남의 인정이 우선이었던 적이 많았기에 남편과 친정엄마의 반응에 바로 의기소침해지긴 했어요.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죠.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발전했다고 느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에요.     

대략 한 열흘쯤이면 오늘 채운 기름이 똑 떨어질 것 같아요. 다가올 그날에, 오늘 배운 데로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요.


진짜 기다려라 셀프주유소! 내가 "혼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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