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거짓말을 한다,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한 여론조사는 메릴랜드대학교 졸업생들에게 대학 경험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한 뒤 답변을 공식 기록과 비교했다. 참여자들은 자신을 좋게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 학창 시절 성적을 실제보다 높게, 또는 기부 이력을 허위로 기재한다. 사람들은 익명의 설문조사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주는 경향이 있다. 미시간대 명예교수인 로저 투랑조는 사람들이 '선의의 거짓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려 한다. 투랑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엉망이라는 걸 인정하기 꺼린다."라고 표현한다. 또한 낯선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강력한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모두 거짓말을 한다(EVERYBODY LIES) 중 '디지털 자백약'부분 발췌 요약)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구글 검색 트렌드에서 드러나는 검색의 경향이 사람들의 숨겨진 욕구나 내면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가정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차마 일기장에도 남기기 어려운 내밀한 생각들을 구글 검색창에는 마치 고해하듯 쓴다. 이런 인터넷 검색창의 기능을 다비도위츠는 '디지털 자백약'이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온라인, 혼자, 결과를 누군가에게 제출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 솔직해진다. 게다가 구글은 솔직하게 질문할수록 내가 원하는 해답을 찾아 준다.
사람들은 도덕과 그에 반하는 것 사이에 서는 경우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비도위츠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보편적인 도덕 가치에 어긋나는 생각을 드러내기 꺼리는 경향이 있다. 마음속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이 도덕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 더욱 숨기게 된다. 반드시 보편적인 도덕 가치가 아닐지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자기 보호 본능에서 비롯된다. 투랑조 교수가 말한 것처럼 타인에게 '엉망인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어딘가 '디지털 자백약'처럼 편안한 공간이나 모임이 있다면 평소에는 '엉망인' 생각이라서 '선의의 거짓말'로 가릴 지라도 그곳에서는 부끄러움 없이 치부를 드러내기도 한다. 반인륜적인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특정 사이트에 모인 사람들이나, 오랜 관계라 허물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에서 그런 일들이 흔히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수치심을 일으킨다면 행위는 달라진다. '휴먼카인드'의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수치심을 비도덕적인 본능을 제어하는 인간만의 고유하고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뽑았다. 양심이 먼저인지 수치심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양심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수치심의 크기도 클 것이라는 예상은 합리적인 추측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로 스스로를 포장한다면 타인에게 자신은 양심적인 사람이며 수치심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것이다. 따라서 다비도위츠의 연구 결과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공감이 적은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이 도덕 공감이 낮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꺼려한다는 증거이다.
다비도위츠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이 연구 결과가 조금 무섭기도하다. 만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면 인간의 선택이 어디까지 끔찍해 질 수 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세계 각지에 있는 인종 또는 민족 차별주의 집단과 극단적인 혐오주의자들, 나치즘이나 포용 없는 극우 극좌의 정치 집단들이 만들어 온 인간성 말살의 환경은 반인륜적인 욕구를 숨기고 있던 어떤 사람들에게는 본능을 억압하던 고삐를 푸는 해방처였을지도 모른다. 인종차별주의를 공공연하게 용인했던 트럼프를 중간중간 언급하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사는 현재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안전한 상황은 아닐지 모른다는 경각심마저 들었다.
인간의 일반적인 이해력과 행동의 선택 방향이 이러하다면, 애덤 그랜트가 독창적인 능력자들에 관하여 쓴 '오리지널스'에서 독창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왜 공감능력과 공동선을 내재화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인류가 알고 있는 도덕과 윤리의 원칙을 잘 지키는 것이 평범함이고, 기존 질서에 반항하고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을 독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도덕적 원칙을 내면화 하는 것이 오히려 본능을 거스르는 독창성이다. 중요한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해 반항하거나 순응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존 질서이든 새로운 의견이든 그것이 어찌하여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원칙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원칙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한가 편한가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다. 보통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한다. 카이스트 김대수 교수의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은 본능에 이끌려가는 것은 아무 노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뇌를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 것이야 말로 탁월함이라고 하였다. 인간이 주도적인 의지를 발휘하는 일은 분명히 순수한 본능은 아닐 것이다. 본능에 따르는 것은 의지적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이를 역으로 적용하면 만일 어떤 행위를 선택하려 할 때 그 행위로 인해 발생하게 될 미래의 복잡계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본능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교육과 배움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김대수 교수는 뇌와 자아를 잠시 떼어 놓는다고 상상하면서 자기 뇌를 훈련시키라고 조언한다. 주도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뇌 훈련은 '삶이란 무엇인가', '우주에서 우리라는 존재들은 어째서 함께 있는 것인가' 등과 같은 인생의 의미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타인에게 '엉망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구는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본능에 가깝다. 엉망으로 보이는지, 평범해 보이는지, 멋있어 보이는지, 그러한 외부적 이유와 상관없이 사람들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살피는 가치관의 정립이 절실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