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

사라토리 하루히코, 지지엔즈

by 마니피캇

사라토리 하루히코, 지지엔즈 공저,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


1. 데카르트

[ 합리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삼는 사고는 동시에 풍요로움을 기대하게 하고, 자신이 기대하는 일에는 합리적인 이유를 붙이고 부정적인 면을 무시하게 합니다....

데카르트의 지혜를 적용해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일단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굳어진 생각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것이 지혜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데카르트 편 중에서


데카르트에 의하면 우리의 지식은 토대가 되는 가장 기초적이고 오류가 없는 지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위에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빌딩과 같다. 저마다 개별적인 지식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지식들이 모여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구조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설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각자의 생각을 이루는 여러 가지 지식들이 그 사람 자체를 지탱하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라도 넘어지면 모든 것이 도미노처럼 쓰러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간은 인지부조화나 편향된 생각에 쉽게 빠진다. 한 번 고착화된 인식은 좀처럼 바꾸지 않으려한다. 심지어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상황에서도 마음 속으로는 '니 똥 굵다.' 라는 한 줌 비아냥으로 자존심을 지키려한다.


타인을 조금 이해했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내가 가진 기존 지식의 틀에 반영된, 즉 해석된 인식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각자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오해의 확률은 크기는 다를 수 있으나 필연적이다. 안타깝게도 타인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식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회의적 태도가 기본 소양이어야 한다. 내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내용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한다.


*회의적 태도는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아니다. 오류에 빠지지 않았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는 것은 인격을 의심하는 태도다. 관계를 끝장 낼 때 쓰는 방법이다.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고려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회의다. (그러나 만일 의도가 담긴 거짓을 발견했다면 회의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2. 흄

[ 흄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아’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아의 정의는 실제로는 그 논거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상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고하고 있을 때는 확실히 사고의 주체가 존재하지만, 사고를 하지 않을 때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 사고의 주체는 계속 존재하는가?’, ‘다음번에 사고할 때 출현하는 사고의 주체는 이전의 사고 주체와 동일한 존재인가?’]

- 데이비드 흄 편 중에서


아, 충격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도 나라는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니!


흄은 영국 경험론의 완성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이 모든 것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인지 능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데카르트를 넘어선 회의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 '자아'의 존재도 그렇게 의심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영혼과 같은 자아의 존재를 의식한다. 그러나 그 존재가 영혼인지, 자아인지 과학의 너머까지 확인할 길이 없다. 과학은 원자가 모여 분자를 만들고 분자가 모여 세포를 만들고 세포가 모여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밝히지만 거기서 어떻게 이런 의식이 '창발'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그냥 그렇다는 현상 뿐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존재조차도 확신하지 말라는 말이다. 천체물리학은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한계가 반경 465억 광년 이내라고 하는데, 그 너머에 있는 우주는 너무 멀어 빛도 영원히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 보다 빠른 속도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니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우주의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지 않는 이상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증명에 따라 우주의 모든 물질은 빛 보다 빠를 수 없다.) 인간은 465억 광년 이상의 우주를 영원히 알 수 없다. 지지엔즈 교수의 표현대로 "우주의 진리가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 만사에 대한 인식의 근거가 이와 같다.


흄의 회의는 진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고 보는 편이 옳다. 미미한 인간의 능력이 이해하는 세상의 '인과'는 사실 인과가 아니라 그저 '습관적 사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성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이를 사용해서 세계를 해석하려고 했던 것일 뿐, 그것이 우주의 진리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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