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by 마니피캇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동물의 뇌와 인간의 뇌>

초식동물들이 태어나자마자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어미 젖을 찾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찬탄한다. 태어난 지 하루만 지나면 그 작고 귀여운 녀석들은 걷기도하고 불안정하지만 뛰기도 한다. 초식 동물의 뇌는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행동하여 생존의 길을 찾도록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시스템화 되었다. 놀랍게도 이 생존 본능은 교육이 전혀 없어도 일어난다. 반면에 인간은 엄마가 안아서 젖을 물려주지 않으면 스스로 젖을 찾아가 물 수도 없다. 인간의 갓난 아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울기와 버둥거리기 뿐이다. 인간의 뇌에는 동물의 뇌에 새겨진 것과 같은 삶의 방식이 미리 새겨져 있지 않다. 인간의 뇌는 팔다리를 인식하고 제어하는 방법 조차 한참의 시간에 걸쳐 학습한다.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인간이 타고나는 선험적인 것들은 다른 동물의 본능과 다른 시스템인 것으로 보인다. 신경생물학자 게랄트 휘터는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먼저 인간 뇌의 이러한 특이함을 이야기한다.


동물은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얻은 생존의 본능이 태어날 때부터 뇌에 기록되어 있다. 말이 태어나면 태어난 직후부터, 세상에서 받는 자극들이 즉시 그 본능적 신경을 자극하여 말 다운 행동을 하도록 끌어낸다. 그러나 인간의 뇌에 새겨진 생존 본능은 그것과 다르다. 인간의 갓난아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외부 조건이나 생존을 위해 자기가 해야할 일을 알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인간은 경험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뉴런 다발이 정리정돈 되어 행동할 수 있다.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라면 사람은 운영체제만 설치된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냉장고는 날 때부터 냉장고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냉장고다. 컴퓨터는 냉장고는 될 수 없지만 추가로 설치되는 프로그램에 따라 여러가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냉장고에게 다양한 기능을 부여할 수도 있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비슷하다. 더 큰 가능성이 열려있다.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열역학 제2법칙>

열역학 제2법칙이란, 고립계의 물질의 상태는 항상 무질서의 정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물리법칙이다. 비유적으로 이해해 보자. 정돈 된 책상은 시간이 지나면 사용자에 의해 반드시 흐트러지게 되어있다. 이렇게 무질서의 정도가 높아지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라고 표현한다. 자연 상태에서 우주의 엔트로피는 계속해서 증가하기만 한다. 사용자가 책상을 사용하는 동안 책상은 최초의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다시 정돈된 상태를 만들려면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에너지가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정돈을 위해 특정한 에너지가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우주의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해 어딘가에서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노력으로 책상정리가 행해져야 하므로- 에너지를 제공한 주체의 엔트로피는 높아진다. 책상의 물건들이 이리저리 옮겨지면서 열이 발생하게되고 책상을 정리하는 사람이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열이 발생한다. 열이 발생한다는 말은 열의 영향을 받은 분자들의 활동성이 커졌다는 말이다. 즉, 열이 발생한다는 말은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결과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해서 엔트로피가 높아진 책상을 다시 예전 모습과 똑같이 정리하여 낮은 엔트로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높아진 셈이다. 따라서 에너지를 투입하여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한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리는 행위는 아니다. 우주에서 전체 엔트로피가 저절로 감소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뇌를 저 책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보자. 인간의 다양한 경험으로 뇌에 정보가 기록된다. 기록이 되는 순간 뇌가 그 정보에 부여하는 가치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기록되는 위치가 정해진다. 뇌의 신경망은 뉴런과 뉴런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고 뇌 안에서 정보전달은 뉴런과 뉴런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에 의해 일어난다. 만일 진돗개라는 정보가 개라는 범주의 정보와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면 신경망은 진돗개가 개의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때 더 많은 뉴런들 사이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더 많이 써야 한다. 한편 이 두 개념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개와 진돗개의 개념을 신경망이 연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존에 뇌가 가지고 있던 정보체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보의 범주를 결정하여 가장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기록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크기 때문이다. 뇌는 다양한 경험을 수용할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 어지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정돈한다. (인간의 뇌는 1.4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지만 멍 때리고 있는 동안에도 몸 전체 에너지의 20%를 사용한다.) 정리정돈의 과정은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로 신경망을 구성하여 나중에 필요할 때 에너지를 최대한 적게 써서 꺼내보기 쉽게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새로운 경험으로 뇌신경 구조의 엔트로피가 높아진 상태에 이르면 인간의 뇌는 가장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이 경험을 종합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든다. 이런 과정이 쌓이고 쌓이면 자기만의 생각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뇌에 기록된 정보들이 중구난방 흐트러져 있다면 그 정보를 사용할 때마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뇌의 성능(?)에 따라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정확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구조로 정보의 체계와 생각의 질서를 만들게 된다.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열역학 제2법칙과 그로 인해 높아진 엔트로피를 낮추려는 뇌의 자동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면 자동으로 최대한 단순화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서로 다른 뇌의 성능과 배경지식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므로 서로 다르고, 오류가 생기며, 감정의 영향을 받고, 교육이나 공부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이런 차이도 자동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각자 자기만의 생각의 질서를 만든다. 그 생각의 질서는 각자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게 존엄한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게랄트 휘터는 이런 이유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두뇌는 관계 속에서 구조화되는 '사회적 기관'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은 타인을 포함하여 다양한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뇌라는 각자의 우주에서 엔트로피를 높인다. 정보를 정돈하고 지식과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모든 사람은 자기 내면의 우주를 형성해 나간다. 이 작은 우주 덕분에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다. 세계를 만나서 이런 과정으로 연결시키는 존재는 인간이 아직까지 우주에서 발견된 유일한 존재들이다.


존엄은 이것으로 증명된다. 존엄은 가치와 의미다. 존엄한 삶이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삶이다. 인간은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음으로써 타자의 가치와 존엄으로까지 확장하는 존재다. 세상과 우주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 세상과 우주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는 특별한 존재다. 인간의 사유능력이 없다면 이 우주는 그냥 물리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규칙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보고 가치를 찾고 의미를 부여한다. 비로소 우주의 존엄이, 생명의 존엄이, 인간의 존엄이 물리법칙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런 것들이 이 세계로 들어왔다. 다른 동물들은 비슷한 구조의 뇌로도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 인간보다 감각과 운동 능력이 더 뛰어난 동물은 많지만 존재의 의미를 묻는 동물은 없다. 그러나 인간 뇌에 구축된 생각의 질서는 타자의 존엄까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라고 다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휘터는 이렇게 말한다. "존엄함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을 지는 태도의 문제다. 얼마나 존엄한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즉, 뇌가 인식한 타자를 내 뇌의 어떤 생각 질서에 두는 가의 문제다. 그러므로 나의 인식 체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뉴런들의 엔트로피는 세상과의 접촉을 통해 자연적으로 높아지고 그것을 정리정돈하는 뇌의 노력을 거쳐 각자의 성품이 형성된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내가 타인과 그리고 세상과 어떤 관계를 지향하는 지의 결과는 뇌의 경험과 학습, 내 성품이 만들어내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우선 스스로가 그것을 원해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가 보다 존엄하게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우선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단지 권유하고, 격려하고 자극을 줄 뿐. 이는 이미 존엄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능하다. 다시말해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은 자기 존엄을 인식하고 있는 타인을 통해 학습이 가능하다. (존엄을 인식하는) 그들에게는 삶을 이끌어가는 내면의 나침반이 있기에 늘 평안하고 유혹당하지 않으며,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을 자신의 의도나 기대,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존엄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권유하고 격려하며 자극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더하기>

그러므로 언제나 먼저 나의 존엄성을 깨달아야한다. 내 존엄을 깨는 존재는 내 감정을 휘두를 수 있는 그 존재 하나뿐이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존엄을 내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을 때 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을 수단화하고 관계가 망가진다. 생각해보았다. 타인과의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했을 때 타인이 말과 행위로 나를 공격했기 때문인가 내가 그들을 보고 분노했기 때문인가? 타인이 어떤 의도를 가져도 내가 그 의도에 상응하는 반응을 하지 않으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즉, 내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를 돌아보아야 나를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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