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갇혀진 시간-"나도 사랑받고 싶어요"
어버이날이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장거리 운전을 감행해서 친정을 갔습니다.
두어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 친정집은 한결같이 그립고 한결같이 애틋하지만 참 한결같이 편치 않은 묘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엄마는 한번도 시집 간 딸의 친정방문을 호들갑스럽게 맞아 준 적이 없습니다. 손주들과 사위는 반갑게 맞아주시지만 늘 제게는 왔니? 한마디도 제대로 건네질 않습니다. 엄마는 자식을 예뻐하는걸 내색하는게 팔불출로 여겨지던 세대이니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른 일곱이 된 지금도 그게 그렇게 서운할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새처럼 팔을 벌려 호들갑스럽게 아이구 내새끼 왔구나 하고 반겨주는 푸근한 엄마 품이 그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느낌이 전 너무 그립거든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기다리는 엄마가 자식을 아끼지 않을리 만무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엄마이기 때문에 조금 흐트러지거나 늘어져도 되는 편안함을 엄마에게서 느끼기가 전 어렵습니다.
늘 잘하는 건 크게 칭찬받지 못하고 당연시 해왔고, 실수하거나 잘못하는건 크게 혼나고 성장한 터라 선택에 있어 늘 불안이 크고 자신감이 없고 주저함이 큰 저는 이번 어버이날에 마음의 결핍에 큰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서른일곱의 제 안에 자라지 못한 아이에겐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있습니다. 말잘듣고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까봐 늘 남의 눈이 무서워 나를 돌보지 못하는 가엾고 아픈 아이가 있지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마 몇번이고 엄마를 바라보았을겁니다. 사랑해주세요 하고... 그러다가 알았을겁니다. 받아쓰기 백점 받아왔을때, 글짓기 상받아왔을때, 반장됐을때 엄마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아 사랑받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그리고 아이는 노력했을겁니다. 사랑받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과가 날수록 아이의 부담은 더 커져갔겠죠. 내야 할 성과는 더 커져만 갔을테니까요.. 부모의 기대도 당연히 비례해 커져갔겠죠. 그 아이가 서른 일곱이 되어 찾아간 어버이날... 엄마는 그 밤 딸에게 남동생 차를 사주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워낙 엄마가 뭘 해주길 바라고 살아온 적이 없었고 그런거에 기댈만큼 엄마가 편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때서야 생각해보았습니다. 엄마 나 이거 사줘 하고 졸라본 날이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습니다. 아주아주 어린날을 떠올려도 나는.....먹고싶은 과자를 검지손가락 입에 물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안돼 이 벌레생겨! 하는 엄마말에 응 하고 고개 끄덕이는 착한 딸이었으니까요.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니 동생한테 미안한것도 많고, 마음아프게 한것도 많아서...."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엄마가 동생에게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지 전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녀석 원하는건 거진 다 들어주며 컸고 제 나름 마음고생은 했는지 모르겠으나 물적 고생은 없었으니 누나 입장에서 보면 사내 녀석 치곤 참 곱게 컸는데 막내라 애잔한지 아니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중3녀석을 엄마밑에 키운것이 그리 애잔한지...
미안하다는 말이 자꾸 명치끝에 맺혔지만 애써 고개 저었습니다. 내 몫은 아닌 말.... 하지만 착한 딸이 되야 하는 나는 아쉽지 않은 듯 그 말을 외면합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은 오고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전쯤 오는 길이었나요...애들까지 태우고 오는 고속도로에 주책맞게도 눈물은 봇물터지듯 흐르고 말았습니다. 억울함이 꾸역꾸역 밀려올라와 그동안의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말잘듣는 딸이었는데 반장선거 나가서 반장 떨어지던날 엄마한테 반장 떨어졌다고 하면 엄마가 실망할게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다가 들켰던 날, 엄마는 나의 마음따윈 들어주지 않고 그저 거짓말한 나를 다시는 믿지 않겠다는 듯 혼냈던 것도 서러웠고, 겨우 국민학생이었던 나를 서너시간도 재우지 않고 시험공부를 시켰던 것도 미웠고, 그 시험이 무서워서 시험만 다가오면 시름시름 앓았던 것도 서러웠습니다.
반장따윈 하고싶지 않았는데 그따위 반장때문에 엄마가 자꾸 학교에 오게 되고 그러니 친구들이 왕따를 시키고 때리고 재수없다고 괴롭혀서 난 정말 반장이 하고싶지도 않았는데, 노래가 좋아서 시작한 합창부를 오래오래 하고싶었는데... 도서관구석에 오래된 책냄새가 좋은 아이였는데... 책을 읽으면 라디오처럼 책을 들을수 있는 상상력이 있는 아이였는데 난.... 왜 이런건 하나도 칭찬도 안해주고... 자전거 한번 가르쳐주지도 않고 동화책도 같이 안읽어주고, 난 엄마 아빠가 손잡아 롤러스케이트도 타보고 자전거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몸이 아파 열이 펄펄 끓어도 학교를 보내 타온 6년 개근상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그 상이 난 하나도 기쁘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데...6년내내 타온 우등상은 소풍때 김밥먹을 친구도 하나 없는 나를 만들었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겠지만 실은 외로워서 책을 읽었고, 말할 친구가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었는데...
대공연장에 일이층이 꽉차게 관객을 모셔놓고 내가 연극공연을 할때도 와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고, 중고등학교 졸업식도 한번도 안오고, 심지어 아이 낳을때도 내 옆에 없었고, 몸조리도 안해주고, 애기낳을때 난 겨우 스물네살이었는데....무서웠는데.....왜 그랬어!!! 왜!!!! 왜 날 이렇게 외롭게 했어!! 왜 날 이렇게 서럽게 했어~!!!!!! 라고.....마음은 다이나마이트가 터지듯 연쇄폭팔을 하고 말았습니다.
엄마는 많은 희생을 하며 정성으로 저와 동생을 키웠습니다. 저도 고집이 세서 사춘기때는 엄마 속도 썩이고 말도 안듣고 애도 먹이고 그랬죠. 엄마가 싫어서 결혼으로 도피해버린 저는 사실 지금 남편이나 시댁이 나와 맞나 안맞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사실 엄마가 저한테 어떤 중대한 잘못을 했다기보다 양육의 문제에 있어서 엄마와 저는 성향이 참 다른 모녀였던 것 같습니다. 표현이 인색하고 그것이 미덕이었던 세대의 엄마는 딸을 자신이 커온 대로 키우셨을 겁니다. 하필 사랑이 많이 필요한 아이를 낳아서 말이지요.
어여쁘다, 잘한다, 궁둥이 두들겨주며 키워지길 원했던 보드라운 마음을 가진 아이를 낳으셨는데 표현이 서툰 엄마는 이런 아이의 다가섬이 얼마나 어색하고 낯설었을까요.. 아마 제가 처음 엄마가 되었을때만큼 젊다기도 뭐할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엄마는 당황스럽고 두려웠을겁니다. 그때야 지금처럼 아빠들이 육아를 도와주던 세대도 아니었고 저희 아빠는 정말 말도 없으시고 고지식하고 그런 성격이셨으니 도란도란 의논할 상대도 마땅치 않았을거예요. 타지에서 시집와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처음 엄마가 된 어린 처자가 자신의 성향과 정 반대의 아이를 키우는 것.. 결국 그것은 아이와 엄마를 다 서럽게 만들고 말았을겁니다.
아이는 결혼을 토피처로 삼아 엄마를 떠났습니다. 엄마의 기대를 저버린 더이상 착하지 않은 딸을 엄마는 마음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천륜이 어디 그렇게 끊어지나요....아이는 계속 엄마 품이 그립습니다. 엄마가 되었는데도 크지 못한 아이가 계속 보챕니다. 안아달라고, 사랑해달라고, 나 좀 보아달라고....하지만 젊을때도 표현이 인색했던 엄마가 평생을 그리 살았는데 달라질리가 있나요... 그래도 좀 누그러지시면 좋으련만...
진심이 아니라는걸 아이는 이제 나이를 먹어 압니다. 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엄마에게 양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엄마가 되고 나도 엄마와 같은 성향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표현이 인색하고 아이의 다가섬이 어색하고 살갑지 못해 늘 마음한켠이 묵직한데 게다가 워킹맘이기까지해서 나름의 자책도 안고 삽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다시 사랑이 아주 많이 필요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또 똑같은 상처를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서른일곱 먹은 딸아이는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저를 상처주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낳은 아이는 저를 상처주는 엄마가 힘겨워 저도 상처주고 엄마도 상처주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서른일곱살이 된 아이는 어느날 문득 공주님방같던 친구 집에서 부럽게 바라본 "미미의 집"을 떠올립니다. 차마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지 못했던 그 미미의 집을 떠올리며 몇번이고 장난감 가게를 지나며 바라보았던 기억이 이렇게 커서도 아이의 가슴에 서늘하게 지나갑니다. 차라리 떼라도 부려볼걸.. 발 동동 구르며 울어라도 볼걸... 왜 동생처럼 떼거지를 부리지 못했나 후회가 가슴을 칩니다. 몇달을 가슴앓이하고서 겨우 나 저거 가지고 싶어요 한게 산타할아버지 미미의 집 주세요~ 하고 기도한게 다라는 것... 결국 나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것....사랑이라는 것을 잃는것이 그만큼 두려웠다는 것....
저는 또 "착한 딸" 역할에 충실하게 될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저 제가 바란 아가 미안하다, 엄마도 몰랐단다. 엄마도 처음 엄마가 된거라서 네가 이렇게 아파하는 줄 몰랐단다 라는 그 말을 저희 엄마 성향을 미루어볼때 절대 들을 수 없을겁니다. 아마 그래서 제 이 내적불행은 절대 해소되지 못할거예요. 뭐든 졸라본 그래서 엄마에 대한 결핍이 없는 동생은 자동차를 받아도 장난감을 받은양 마음이 흡족하지만 미미의 집을 조르지 못한 저는 엄마가 해준 반찬통을 보며 저 반찬만큼 또 얼마나 착한 딸이 되어야하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정작 엄마의 도움이 필요할때 선뜻 엄마에게 무언가 도움을 청하지 못합니다. 되갚아줄 일이 또 짐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난 시간을 원망하며 지낼순 없잖아요. 저는 이제 구구단은 잘 못외웠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사랑이 많았으며 강아지를 좋아하고, 글쓰기와 책을 좋아하던 아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늘 주눅들고 움츠려들어 종종거리고 겁먹은 고개를 주억거리던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참 잘했어.... 진짜 너무너무 애썼어. 이제 그만해도 돼. 애쓰지 않아도 되고 하다 다 못해도 돼.
아무도 혼내지 않을거고 아무도 나무래지 않을거야. 내가 이만큼 커서 힘도 세졌으니 이제 내가 너 사랑해줄께. 아무도 널 괴롭히지 않을거야. 그동안 힘들었지? 이제 쉬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미미의 집을 떼써서 가져보지 못한 나에 대한 원망이 컸을겁니다. 엄마에 대한 원망보다는 무언가 발버둥치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나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커서 서러운줄도 모르고 살았을겁니다. 내내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사느라 내 영혼은 돌보지도 못하고 그런 마음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아직도 그 어느날의 어린 계집애는 유리벽 너머 즐비한 장난감들 사이의 핑크색 상자에 쌓여있는 미미의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했던 새소리 초인종이 울리는 인형집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말이죠. 그 밤 엄마와 아빠가 이만 오천원이라는 그 당시로는 적지 않았던 장난감 가격을 이야기하는 것을 잠결에 들으며 조르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버린 철들어버린 아이는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엄마가 아빠의 박봉을 쪼개 어렵게 사준 전집 책을 만지작거리며 필시 미미의 집보다 훨씬 비쌌을 그 책을 아쉽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 책을 사주기 위해 엄마는 연탄도 아끼고, 엄마가 먹을것도 못먹고, 모으고 쪼개서 사준 책이었을텐데... 그 책 좋아하는 아이도 그때만큼은 그 책이 마냥 달갑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두 발 뻗고 울어라도 볼걸....
무언가 가지지 못한 마음의 결핍은 누구에게나 있죠.
어느 한구석 삶의 구겨진 부분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을 구겨진 채로 두는가, 아니면 그것을 위해 울어보고 떼써보고 발버둥 쳐보느냐의 차이는 큽니다.
무언가를 향해 내가 팔 뻗어 가져보기 위해 힘써 보는 것과 그저 당연한 듯 내 몫이 아닌듯 포기한 것이 주는 상실감의 크기가 같을 수는 없겠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느 시간속의 "미미의 집"이 있으신가요....
이제라도 부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 손을 잡아주실 용기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