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멈추게 하는 것들, 쉬어가라고.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멈춤의 신호들. 바쁘게 살려고만 한 시기엔 멈춤의 신호들이 반갑지 않았다.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신호였다. 내 속도와 흐름을 방해하고, 막아서는 장애물 같았다. 무시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여겼던 마음이 컸다. 멈춤의 신호들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이기고 지나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곤 했었던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에 붙들려 있던 것일까. 장애물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라는 주입된 사고방식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삶에서 마주하는 멈춤의 신호는 의지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멈춘다는 건 곧 통제할 수 없게 되고, 흐름이 끊어져 불안을 느끼게 했다. 불안, 그 감정에 갇히는 것이 싫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가두는 기분. 그런 멈춤의 불안을 느끼기 싫어서 내 흐름에 되도록 공백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틈 없이 메우려고 더 무엇을 하려고 했고, 더 자극하고 열을 올리며 멈춤을 피하려고만 했다. 내 삶에 번아웃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멈춤의 회피는 속도에 더 집착하게 만들었다. 틈이 생기면 멈추게 될까 하는 불안이 생겨났고, 멈추지 않게끔 속도에 더 연연하며 애를 쓰게 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유지하고 싶은 것들을 계속 붙들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
삶 한가운데서 마주하는 ‘멈춤의 신호’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마흔을 건너오면서부터다. 정확히는 몸이 아픈 시기를 겪은 이후부터. 당시 난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내 자율신경계는 매년 가장 나쁜 지표를 찍어대고 있었다. 면역력은 저하되면서 쉽게 피로해지고 어지러움도 극심해서 쉬는 날에는 시체처럼 누워 지내는 신세. 그런 상태로 몇 년을 지내니까 내 몸에 이상이 생겼고, 결국엔 내 장기 한 지점에 자리 잡은 다발성 양성 종양까지 커져서 수술해야만 했던 상황에 이르렀었다.
삶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사건이었다. 당시엔 왜 하필 속도를 내야 하는 이 순간에 이런 멈춤의 신호에 걸리는 것인지 처음엔 화도 났고, 이 불행한 신호에 대한 원망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이 멈춤의 신호에 주된 책임은 다름 아닌 내게 있다는 걸. 스스로 속도 조절하지 못하고 급하게만 살아가려고 하니, 결국 몸에서 먼저 멈춤의 신호를 보내온 것이라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면 앞으로는 정말 큰일 난다고 알려주는 경고라는 걸.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댔었다. 이제부터는 조급한 마음을 멈춰야 원하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더 늦기 전에 건강한 방식을 찾아서 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주변 속도에 연연하며 사는 방식은 진정한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지금까지는 속도를 올리며 살아가는 연습을 했다면, 앞으로의 삶은 속도를 늦춰가면서 살아가는 연습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가 '멈춤'이 보내는 신호는 내게 전혀 다른 의미로 채색됐다.
멈추는 것이 불안했던 내게 몸이 보내온 적신호는 일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불행의 사건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멈추지 않으면 더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심신이 만신창이군. 그렇게 번아웃을 겪게 되니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느낀 크고 작은 멈춤의 신호들을 간과하고 무리하게 끌고 온 것은 결국 나의 방식이었고, 죽기 살기로 악착같이 극복하려고만 하려는 이 방식은 더는 현명한 선택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보내온 이 멈춤의 신호를 이제는 간과하지 말고 수용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에 마음도 꿈틀댔다. 생각과 마음이 통하는 전율이 느껴졌다. 직진 코스만을 타고 싶었던 내게 돌아가는 우회 코스를 선택한 건 이탈된 사건이었지만, 마음을 따라 이전과는 다른 선택으로 용기를 내어보게 됐다. 멈춤의 신호가 삶의 방식에 변화가 필요함을 알려주는 의미로 새로이 여겨졌기에.
멈춤의 신호를 수용하고 스스로 멈춰보는 일. 일상에서 틈틈이 마주하게 되는 멈춤의 신호를 사방으로 시선을 옮겨서 주변을 둘러보고 생활과 방식을 돌아보라는 의미로 여기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따뜻한 기운들이 마음에 더 잘 스며드는 기분이 났다. 속도에 매달려 살아낸 시간에서 바라보지 못한 아름다운 삶의 풍경들이 속도를 줄여주니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나를 멈추게 하는 상황들은 위협이 아니라 돌아봄의 신호로 여기니 마음이 성나지 않았다. 나를 멈칫거리게 하는 상황들을 주변을 둘러보라는 환기의 신호로 받아들이니, 내 마음의 조급함이 줄어들어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유해지고 여유도 점차 찾아가게 됐다. 불안해서 멈출 수 없었던 멈춤의 신호를 수용해 본 경험은 내게 긍정의 변화로 돌아왔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멈춤에 대한 의미를 긍정의 의미로도 확장해서 해석해 볼 수 있는 변화가 찾아왔으니 말이다.
속도를 잘 조절해나가는 요령은 삶의 베테랑이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원활한 적응을 위해 주변과 맞춰 속도를 낼 필요도 있지만, 삶의 장거리를 건강하게 완주하려면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속도 조절은 균형을 유지해가는 일이다. 멈춤의 시간을 즐기는 여유는 속도를 유연하게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속도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몸으로 알게 되는 것 같다.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멈칫거리는 신호에 대해 화를 내 거나, 겁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 상황만을 놓고 보면 멈추게 만드는 신호가 유쾌하지 않겠지만, 그 신호 덕분에 좀 더 안전하게 시야를 넓혀서 두루 살펴보며 지나갈 수 있는 방식을 취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만약 당시에 그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속도를 내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멈춤의 의미는 이제 내겐 신호등과도 같다. 그 앞에선 일단 속도를 줄이고 의식을 환기하라는 신호다.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마음의 밭에 여유가 생기고, 그 틈으로 부드러움이 피어난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날 선 기분이 멈춤의 시간에서 여유를 찾아갈수록 둥그스름하게 뭉툭하게 바뀌어 가는 걸 체감해간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삶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멈춤의 시간을 놓친 것들을 재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기꺼이 수용하기 시작하니까 삶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살다 보면 여기저기 비교하는 시선들 속에서 삶이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이 각박하게 느껴지고 극심한 피로감 고층 건물처럼 나를 둘러싸인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런 순간, 이제는 나를 잠시 멈춰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찾아본다. 내 급한 마음 때문에 삶의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여유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일이다.
쉬어가는 시간 또한 인생이고 삶이다. 어쩌면 쉬어가는 시간이 달리는 시간보다 더 값진 날인지도 모르겠다. 그 틈에서 삶의 진귀한 보물을 자주 발견하게 되니까. 바쁜 일상 속에서 잠깐이라도 심신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 싶다. 숨겨진 진귀한 보물을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된 셈이니. 삶에서 진귀한 보물 중 하나는 깨달음을 발견하는 것이니까. 살아가면서 삶의 여정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지만, 그 세월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깨닫고, 배워갈 수 있을 때 사람은 완숙해져 가는 것 같다. 깨달음이 늘어가는 즐거움,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이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