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념 치는 사람일수록 깊은 맛과는 멀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사람 관계는 나 홀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고 애를 쓰며 노력을 한다 해도 혼자서 좋은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은 실상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느끼는 정서와 감정을 표현해내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고, 서로가 상호작용 속에서 감정을 주고받으며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상호 간에 노력은 할 수는 있지만, 한쪽에서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은 희생적 관계이지, 건강한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사람 관계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서로가 주관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있는 정서와 감정은 시시때때로 작용되는 상태에 따라서 작용되기 때문에 이성적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원초적 속성에 가깝다. 사람은 긍정적인 감정만큼이나 부정적 감정도 존재이기 때문에 주고받는 감정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 그릇은 상황에 따라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본능상 한결같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 분에 넘치게 좋은 사람이 되어 주려고 애쓰기보다는, 적어도 나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에 맞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사람 관계로 고통을 느끼는 건 어린 나이에서만 홍역처럼 겪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관계가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덜 상처 받고, 덜 피곤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무턱대고 관계를 맺는 일을 꺼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역동들은 겪는 일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날씨처럼 관계도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이 있다. 이는 부정하고 싶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닌 현상이니 자연의 이치로 수용하는 것이 좋다. 다만 부정적 감정을 조금 더 현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면 관계의 고통은 완화시킬 수 있다. 어떻게? 나름의 사람 관계 기준들을 마련해가면서 고통은 줄여가고, 즐거운 사람 경험은 늘려서 관계 탄력성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 기준은 삶을 적응적이고 유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편향되고 왜곡된 관점에서 마련된 기준은 자신의 삶을 부적응적이게 만들어 더 관계를 위축시키고 고립감을 키우게 될 테니 말이다. 최대한 객관적이고, 타당하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관계의 유익성을 검토하며 기준을 세우고 조절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 사람 저 사람 겪으며 정리한 생각 하나는 사람 관계도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인맥의 확장보다는 소수라도 내실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서 더 가치로운 영향을 받는다. 분별하지 않고 일단 친해지고 보자는 식의 양적인 사람 관계는 순간순간 유희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지만, 관계의 깊이가 얕고 쉽게 사라진다. 더욱이 그런 관계는 소모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를 잃어가는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내실 있는 관계 추구는 내 분에 맞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나름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첫 기준은 양념을 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해본다. 이 사람 저 사람 겪어보니 양념을 치려는 사람들은 대개 사람과의 관계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짙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목적성에 의한 관계는 속도와 확장에 많은 신경을 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속전속결식으로 관계를 터서 빠르게 친밀함을 내세워 이렇게 저렇게 이용하기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 두려는 습성을 보이곤 한다. 목적이 달라지면 금세 사라져 버린다. 깃털만큼이나 저리 쉽게 날아다니고, 빈대떡만큼이나 뒤집기가 쉬워지는 관계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같은 목적성을 둔 관계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공통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가는 일의 관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오히려 더 협업하기 편하고, 깔끔하기도 하니까.
이 같은 방식은 사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방식에서는 적합하지 않겠다. 특히 인간 대 인간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거나, 삶을 나누며 정서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인간관계를 추구하고 싶다면 위처럼 속도를 내기 위해 양념을 치는 사람의 방식은 더더욱 어울리지 못하다. 관계를 맺는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는 관계도 속도로 여긴다. 목표를 하루라도 빨리 달성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있는 갖가지 양념을 치려고 든다. 또 그럴싸하게 관계를 포장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 관계를 이용해 있어 보이고 싶은, 그런 영향력을 쌓으려고 하는 일에 열중하는 경향을 띤다. 관계의 풍성함을 내보이기도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 행태일 것이다.
양념을 잘 치는 사람들은 친밀감을 형성하는 일에 능숙한 편이라서 같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쉽게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고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면을 그대로 믿기에는 위험하기도 하다. 목적에 의해 꾸며지고 조작한 면들이 다분하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에 가깝다고 본다. 솔직하게 마음을 교류해가며 진정성을 추구하는 삶의 친구를 찾는다면 이런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더 낫다. 양념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나면 속이 갈증이 나고 속이 불편한 것처럼, 양념을 치는 사람도 겉보기 좋은 맛만 낼뿐, 마주할수록 속은 텅 비어 있거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석연찮은 감정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챙겨야 할 소중한 것들이 많은데 속 빈 관계나, 속이 엉켜 있는 복잡한 관계를 붙들고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마저도 가볍게 치부하는 처신일 테니 말이다.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 추구는 속도가 아니다. 목적 달성을 위한 일적인 관계의 습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를 추구하는 마음이라면 빨리 편안해지고, 빨리 친해지고 싶다고 속도를 낼 필요도 없다. 사람과 사람 간에 진정함을 마주하기까지는 일정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진정성은 속도가 아닌 이해의 과정이다. 한결같이 지니고 있을 성질이기에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속도전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 대개 깃털만큼 가벼운 관계에 그치고 만다. 그런 감정에 휩쓸려 내 소중한 시간과 정,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의 벗이 될 수는 없다. 그 또한 서로의 의식과 방식이 조화로울 수 있어야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다. 또 인연은 속도가 아니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오래 좋은 관계로 머물 수가 있다. 무분별한 관계 맺기가 아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에 맞는 내실 있는 관계 속에서 인연은 이어진다. 이 같은 관계의 속도는 더딜지라도, 정서적으로는 더 편하고 좋다. 지속적인 사람 관계는 속도가 아닌 깊이라는 걸 느끼게 되니 구전으로 내려오는 뚝배기 같은 사람이 진국이라는 말이 더 진하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