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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혜윰 goodlife Oct 27. 2020

아프니까 괜찮지 않아, 수용

괜찮다는 어설픈 말로 감정을 욱여넣지 말아요.

마음이 왜 이렇게 뿔이 났을까. 왜 이런 상태가 된 것일까. 매일 서너 시간 산책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여러 의문을 던져가며 마음에게 물은 후, 생각해보고 다시 마음에게 물어가는 식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삶의 제동을 겪기 전, 지난날들에서는 감정에 생채기가 날 적마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라는 말로 마음을 다독이며 그저 감정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랐다. ‘괜찮아’라는 주문은 그 순간순간의 감정을 넘길 수 있게 해 주었기에 마음의 진통제와도 같았다. 이런저런 상황들에 치이며 감정이 흐트러지고 아픈 날들을 살아내기에는 제법 쓸만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진통제는 삶에 제동을 겪은 후로는 더는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괜찮다’라는 주문은 더는 내게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게 괜찮아? 괜찮아서 이렇게 날 만신창이로 만들었니? 뭐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아등바등했니? 내실 없이 허울만 좇았던 거지. 진통제는 낫게 하는 게 아니야. 그 순간의 고통만 잠시 잠재울 뿐 사라지지 않는다고. 알겠니? 제대로 성의껏 좀 봐줄 수는 없는 거니?'


뿔난 마음이 이렇게 한참을 내게 꾸짖었다. 얼마나 방치해뒀으면 이렇게 거칠게 구는 건지.. 밀려오는 자책감이 성난 파도처럼 크게 느껴져서 어떻게 어디서부터 달래야 할지 막막했다. 그냥 그 소리를 들어줬다.




이토록 삶에 쌓인 감정을 토해내는 시간을 통해 내면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든 생각은 ‘괜찮다’는 말은 진정 나를 치유해 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마음을 쑤시고 찌르는 생채기는 시간이 지난다고 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괜찮아’는 단지 응급처치로 아픈 부분을 지지고 봉합한 것에 불과한 조치였다. ‘괜찮아’라는 말은 그 순간의 고통을 모면하려고 서둘러 괜찮아지게 요구한 스스로 억압시킨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살펴보지 않고서 내뱉는 '괜찮다'는 말은 제대로 돌보는 처신일 수 없다. 왜 어디가 아픈 건지 알지도 못한 채 괜찮다고 하는 건 감정을 보듬는 것이 아니라 기만하는 행위이다. 결국 곪아서 더 큰 염증을 일으키고 상처가 되기 쉽다. 스스로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자신의 본질적 상태를 외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감정을 숨기는 거짓된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피해 의식만 더 자라나게 할 뿐이다. 불편하고 찌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면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결과제로 남아 언제 어디서는 불청객처럼 한 번씩 튀어나와 마음의 혼란을 더 가중해 버린다. 제대로 감정을 해결해 주지 못하니 아픔에 대해 덤덤해질 수 없는 건 아닐는지. '아프니까 괜찮지 않다’가 솔직한 감정인데, 그렇지 못해서.     




마음을 돌보는 과정에서도 문득문득 지나간 생채기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날 흔들고 아프게 했던 그때의 잔상들이 떠오른다. 자다가도 떠올라 갑자기 울분이 올라오기도 한다. 마음을 치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후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오면 ‘괜찮다’라는 말 대신에, ‘들어줄게. 말해봐.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건데’하고 물어주었다.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을 정말 마음에서 먼저 괜찮다고 할 때까지 감정을 덮지 않고 더 펼쳐서 들여다 봐주며 사계절을 보내고 또 보냈다.       


괜찮아지라고 넘겨 버렸던 그 생채기는 정말 괜찮은 상태가 되었던 것인지, 감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그저 괜찮다고 넘기고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는지.. 심신이 아파도 어떻게든 죽지 않고 또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그럼 괜찮다고 여겼던 것은 아닌지.. 시간이 그저 약이니 견디면 된다고 마음을 다지기만 하고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얼마나 어떻게 감정이 손상되고 아픈 상태인지 제대로 점검하지 않은 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만 바빴던 것은 아니었는지….     


재촉하지 않고 마음 스스로가 풀리고 일어나는 시간을 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거칠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며 솔직한 감정을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통제하려는 자기감정 말고, 현실에서 마주하는 진짜 감정을 보기 시작하니 감정과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보였고, 나는 이런 감정도 느끼는구나, 를 알아채고 수용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알지 못했던 내 감정을 찾아내 인정해 주고 보듬어주는 이 과정에서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마음이 치유받고 있다는 기분이 이런 건인지도 모르겠다.  




아프면 애써 괜찮은 척하며 서둘러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그럴 때는 홀로의 시간을 보내며 어느 부분에서 아픈 것인지, 세밀하고도 깊이 있게 자기 마음을 헤아려 봐주면 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마음을 이토록 헤아려 봐줄 것 같은가. 내 마음, 감정을 온전히 들여다보며 스스로 돌보는 노력.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사랑해 주는 방법이 아닐까.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일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조금만 더 넉넉한 시간을 주면 좋겠다. 아프다고 하면 괜찮다고 하지 말고, 아픈 감정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말이다. 서둘러 봉합하면 감정의 유착이 생겨 생채기가 날 때마다 더 크게 봉합해야 할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반면교사 삼아서 시간이 걸려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살피고 바닥을 치고 스스로 다시 떠올라 올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또다시 크고 작은 생채기를 겪더라도 진짜 감정을 꺼내놓고 온전하게 치유해 주며 살아갈 수 있다. 솔직하지 못한 감정들, 더는 회피하지 말고 직면해서 마음을 챙겨주자. 내 마음은 스쳐 지나가는 남이 아니다. 내 마음은 곧 나이다. 사랑하는 나, 보살펴줘야 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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