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새벽 네 시의 해장국집은 조용했다. 나와 은선은 말없이 앞에 놓인 해장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오른 술기운이 오히려 흥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새벽의 해장국집을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시간의 해장국은 음식보다는 안락한 장소를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막차는 이미 한참 전에 끊겼고, 택시를 타기에는 첫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새벽의 해장국 집은 시간이 영원히 회귀하는 듯이 흘러간다.
나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은선은 앞에 놓인 해장국을 숟가락으로 헤집으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소주를 잔에 채워 털어 넣었다. 밥보다는 술이 더 당겼다.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그랬다. 창백한 형광등 빛 아래 놓인 해장국은 먹음직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건 마치 백화점 푸드코트에나 전시될 장식용 음식 같이 보였다. 그때였다.
짜악!
영원 회귀하는 해장국집 안의 적막과 권태로움을 깨는 따귀 소리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너무 생생하고 또렷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해장국집 안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무기력한 침묵이 일순간에 호기심 어린 고요로 바뀌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따귀 소리에 바로 이어진 한 여자의 악다구니 때문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상황과 대사 모두 지독히도 클리셰적이어서 나는 순간 풉-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따귀를 때리는 여자와, 그녀가 내뱉는 절규에 가까운 대사.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니, 세상에. 그건 너무 흔해서 이제는 더 이상 드라마에서 조차 쓰이지 않을 대사였다. 주인공이 그런 대사를 날렸다가는 게시판은 바로 분노한 시청자들의 게시글로 터져나갔을 테니까. 때로 어떤 문장들은 그렇게 너무 낡고 뻔하다는 이유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같은 표현 대신 '이거 실화야?'같은 표현이 더 '트렌디'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것처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그 상황은 내 옆에서 생생하게 중계됐다. 덕분에 굳이 몰라도 될 어느 남녀의 이별 사연을 새벽 네시에 얼큰히 취한 채로 듣게 됐다. 남자가 이별을 선고하자 술이 몇 잔 들어간 여자가 격해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따귀를 날린 것이었다. 이 모든 상황 앞에서도 은선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침착하게 해장국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저 사람들, 무슨 드라마 찍는 것 같다 그치?"
"드라마는 무슨. 저런 뻔한 대사나 치는 3류 드라마는 요즘 인기 없어."
"뭐, 3년 차의 뜨뜻미지근한 커플 입장에서 보니까 저런 격정적인 로맨스가 꽤나 신선하기는 하네"
"쟤네도 우리처럼 3년을 만나봐. 저렇게 헤어지나. 카톡으로나 안 헤어지면 다행이지."
"우리는 헤어질 때 안 저럴까? 마치 안부인사를 건네듯이, 잘 들어가라-이렇게 끝내려나?"
"글쎄, 적어도 남들 보는 앞에서 내가 네 따귀를 날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저, 저 봐라. 쑈 하고 앉았네."
감정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몸부림치는 여자를 제압하기 위함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둘 다였는지 남녀는 어느새 부둥켜안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너무 클리셰의 범벅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새벽의 해장국집에서 벌어진 3류 드라마는 남자가 여자를 진정시켜 사태를 수습한 뒤, 밖으로 나가면서 끝이 났다. 해장국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형광등 빛 무기력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앞에 놓인 해장국은 다 식어빠졌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나왔을 때 모습 거의 그대로였고, 초록색 병 안에 들어있는 소주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은선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면 술과 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듯도 보이기도 했다.
"가자. 졸리다."
정신이 번쩍 난 듯이 고래를 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챙겼다. 계산대로 가서 카드를 내밀자, 점원이 아까의 소란에 대해 사과했다. 대꾸할 기력도 없었던 나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 뒤 가게를 나왔다. 은선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한바탕의 시끄러운 술자리가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고요는 묘하게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마치 샤프의 노래 '연극이 끝난 후'의 가사를 연상케 했다. 화려함과 왁자지껄함 뒤에 찾아오는 무서우리만치 허무한 정적. 그렇다면 술자리도 일종의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와 은선은 첫차를 타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가는 길, 멀지 않은 건물의 대리석 계단에 검은색 형체가 보였다. 해장국집의 남녀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계단에 앉아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입 밖으로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쑈 하고 있네"
0에 수렴하는 마음
나이가 드는 일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는 거울을 보거나 불어난 뱃살을 부여잡으면서가 아니라,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에 느껴지는 피곤함의 강도가 배로 느껴질 때다. 첫 차를 타고 들어간 그 날, 나는 주말 내내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보냈다. 주말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에서 기어 나와 은선을 만났다.
가볍게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뒤 출근을 위해 일찍 들어가는 것으로 합의를 본 우리는 영화관 근처의 안양천을 가볍게 걸었다. 일요일 밤의 안양천은 의외로 한산했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마지막 남은 숙취 한 방울이 실려 날아가는 듯했다. 월요일의 근심 걱정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여유롭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일요일 밤이었다.
"그저께 그 커플"
은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응?"
그녀가 다짜고짜 커플을 이야기하길래 처음엔 뭘 말하려 하는지 몰랐다.
"왜 새벽 네시에 해장국집에서 울고불고 싸우던 커플"
"아아, 그 커플. 갑자기 왜?"
"어떻게 됐을까?"
"글쎄... 헤어졌겠지. 둘이 그날 술기운에 모텔을 갔든 그냥 조용히 집으로 갔든 말이야. 어떻게 어떻게 다시 만난다고 해도 결국은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아마 여자는 또다시 헤어지자고 말하는 남자한테 전화하고 매달리겠지만. 남자야 뭐, 그 잠깐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달래주는 척했던 걸 테고."
"그래?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왜?"
"그렇게 감정의 찌꺼기가 바닥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쉽게 헤어지지 못할 것 같거든. 어떤 형태로든 그 감정들을 끝까지 써버려야 하지 않을까. 네가 말한 대로 울며불며 매달리든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든 간에 말이야. 그게 완전히 헤어진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헤어진 게 아니라 연애의 연장선이지. 연인 간의 헤어짐이라는 게 무 자르듯 그렇게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게 아니잖아.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어제의 그 커플처럼 결국 헤어지고 술에 취해 전화하고, 매달리고, 붙잡아서 다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졌다가... 그런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둘 사이에 남아있는 감정들을 모두 다 써버려야 하는 거 아닐까. 마음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그 수치가 0에 근접할 때까지."
갑자기 은선은 이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겉으로는 우리가 그날 목격했던 커플에 관한 얘기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건 그녀와 내가 외면해왔던 우리의 관계에 대한 말이었다.
그날 새벽의 해장국집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남은 감정 따위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그녀와 나를 연인으로 묶어주던 작은 결합마저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그걸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고, 그녀는 피곤함에 지쳐 침묵하고 있던 것이었다. 상대가 먼저 말할 때까지 비겁하게 현실을 외면하면서.
우리는 해장국집의 커플들들처럼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둘 사이에 더 이상 남아있는 마음이 없었고, 쏟아낼 감정이 없었다. 은선과 내 감정은 마치 새벽 네 시의 해장국 같았다. 우리 둘을 커플로 묶어주던 무언가는 이미 우리 안에서 종말을 고한 지 오래였다.
그날 은선과 내가 목격한 커플의 모습은 모습은 정확히 우리의 모습과 정반대였고, 우리의 마지막(일 것이라 예상되는)모습과도 달랐다. 우리는 절대로 저렇게 헤어질 수 없을 것이었다. 우리 둘 사이의 마음은 이미 다 식어버린 뒤였고, 그 마음은 0에 수렴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강남역 술집에서 마주했던 그 커플은 결국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지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