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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17. 2020

준석

연애의 종속 시행

- 저는 카푸치노... 아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습관처럼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주문할 뻔했다. 취향도 아닌 카푸치노를 반사적으로 주문하게 된 건, 순전히 헤어진 남자 친구 때문이었다.


3개월 전 헤어진 그는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늘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 사이에서 고민했다. 메뉴를 기다리는 종업원 앞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실지 카푸치노를 마실지 고민하는 그 모습이 처음엔 사뭇 귀여웠다. 내가 보기엔 쓸데없어 보이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이 색다르게 보였다. 시작하는 연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방의 모든 면에서 사랑을 느낀다는 점에 있다.


한 번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다음엔 카푸치노를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늘 알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 왜 맨날 아메리카노랑 카푸치노 사이에서 고민해? 그냥 한 번씩 번갈아가면서 마시면 되잖아.

- 음료 메뉴를 선택하는 건 그렇게 딱 잘라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때마다 먹고 싶은 게 달라진다고. 아까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이번에 또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을 수도 있어진다니까. 그런데 카푸치노를 선택하지 않으면 또 괜히 카푸치노가 생각나기도 하고..

- 뭐, 그건 그렇지.

- 그러니까, 커피 주문은 누적된 음료의 경험이 다음 메뉴에 영향을 끼치는 종속 시행이 아닌 그때마다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 독립 시행이라고.

- 하하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독립 시행이랑 종속 시행씩이나 나올 일이야 그게? 너 요즘 빅뱅이론 봐?


그렇게 같은 경험을 몇 번 더 겪고 나서야 알게 된 건, 그는 결국 자신이 고르지 않은 음료를 딱 한입이나 두 입 정도씩이라도 마시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카푸치노를 시킨 날이면 기어이 내가 시킨 아메리카노를, 아메리카노를 시킨 날이면 카푸치노를 한 두 입씩 마시곤 했다. 연인 사이에 서로의 음료를 공유하는 일쯤이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만난 지 반년쯤 되면서부터, 나는 둘 중에 준석이 시키지 않은 음료를 주문해 마셨다. 그때는 그런 걸 사랑이라 생각했다. 네가 고민하는 메뉴 둘 중에 하나를 주문해주는 일, 고민의 선택지를 소거해주는 사랑의 해결사! 처음에는 카운터 앞에서 한참 동안 고민하는 준석을 보느니 그와 조금이라도 빨리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고, 나중에는 그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앞에 있는 종업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와 일 년 반 정도를 만났다. 카푸치노와 아메리카노 따위를 고르는 일에서조차 우유부단하던 그는 이별의 순간에도 나와 새로운 그녀 사이에서 선택을 유보했다. 결국 선택은 이번에도 나의 몫이었다. 그딴 순간에서조차 선택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얼굴을 보면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것이 뻔했기에, 나는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 너 나한테 다신 연락하지 마. 쓰레기 같은 새끼.


좋게 끝나지 않은 연애였으나, 모든 연애가 그렇듯 그와의 연애도 내 생활양식과 습관을 바꿔놓았다. 준석은 떠났고 나에게는 카푸치노가 입버릇처럼 남았다. 이제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습관의 힘은 무서웠다. 카푸치노 하나요, 하고 말했다가 황급히 아메리카노로 메뉴를 변경하는 일. 준석이 틀렸다. 카페에서 메뉴를 고르는 일은 독립 시행이 아니라 종속 시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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