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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11. 2021

한나

오늘은 기필코 따릉이를 타고 반포 한강공원에 도착해 노을을 보겠다고 다짐한 날이었다. 요 며칠 노을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지만, 목적지에서 본 하늘은 늘 어두웠고 해는 다 떨어진 뒤였다.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노을이 지는 모습을 봤을 때는 한남대교를 지날 때쯤, 왼편으로 보이는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흘끗거린 게 전부였다.


다행히 오늘은 해가 지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온 탓에, 자전거를 타고 45분이나 달려왔음에도 해가 이제 막 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수교를 바라보며 잠시 앉아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누군가 왼쪽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걸어왔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내 왼편에 앉은 여자였다. 한 손에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있는 그녀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보통의 회사원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검은 슬랙스에 파란 스트라이프 셔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과 얇은 금속테 안경을 낀 그녀의 자기소개는 누가 보더라도 너무 수상쩍었다. 누가 자신을 ‘보통 회사원’이라고 소개하며 한강에서 말을 건단 말인가.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얘기가 하고 싶어서요.”

“아…네”


나는 떨떠름한 티를 온몸으로 드러내며 잔뜩 경계하면서도 속으로 육두문자를 삼켜냈다. 21세기 한국 서울 한복판에서 갑자기 다가오며 말을 거는 부류의 열에 아홉은 ‘도를 믿으십니까?’와 같은 부류의 이상한 사이비 종교 단체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행색은 내 이런 생각을 공고히 만들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뭐랄까,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인위적인 무해함’ 같은 게 있었다. 절대 자신이 상대에게 해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듯한 인위적인 무해함.


그러나 그녀는 정말 어떤 목적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부산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화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그녀는 그냥 아무에게나 얘기를 걸고 싶어 용기 내 말을 걸었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성선설과 성악설,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과 사람에 대한 믿음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나는 마침 밤새도록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을 정주행 한 날이었다.


“설마 무슨 오징어 게임 참가 같은걸 제안하려는 건 아니죠?”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는 내게, 그런 거 아니라며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이런저런 얘기를 건성으로 받아치다가, 따릉이 반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그 순간까지도 번호를 달라고 하며 나중에 골치 아프게 ‘들러붙을’것을 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정말 끝까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으레 보일법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한 마디 던졌다.


“솔직히 저는 한나 씨가 무슨 종교 이런 데서 나오신 분인 줄 알았어요.”

“아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멋져요. 얘기가 하고 싶어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는 거. 오늘 대화 즐거웠습니다.”


따릉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계속해서 그녀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과연 뭐였을까? 정말 타지에서 올라온 외로운 누군가가 건넨 외로움의 손길이었을까? 아니면 잔뜩 경계한 내 모습을 보고 지레 포기한 진짜 포교인이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어느 쪽이든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도 오래도록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욱 씨는 사람을 잘 안 믿으시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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