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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11. 2020

내 옆에 앉아

RM- 지나가 (with Nell)

(중략)


공부도 안 하고 싸돌아다닌다고, 발랑 까져서 연애질만 한다고 쫓겨난 강찬이 주영의 집에 쳐들어와 냉장고에 있던 소주를 반이나 마신 날이었다. 취한 강찬을 집에 데려다주고, 어머니에게 등짝을 두드려 맞던 강찬을 방에 들여보낸 후, 한참 이어지던 강찬 어머니의 신세한탄을 들었던 날이었다. 강현은 친구 집에서 자고 올 거라고 괜찮으니 자고 가라고 했던 밤, 주영은 목이 말라 새벽에 눈을 떠 몸을 일으켰을 때 침대 아래 자고 있던 사람이 강현이어서 너무 놀라 다시 누웠다가 슬쩍 이불을 내리고 강현을 훔쳐보았다.

"깼어?"
"언제 왔어요? 오늘 못 들어올 거라고 하셨는데."
"이상하게 오고 싶더라고?"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강현이 등을 돌리고 누웠다. '신경 쓰지 말고 자.' 주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잠이 든 건지 강현의 얕은 숨소리가 들렸다. 주영은 강찬의 방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을 바닥에 댔다.

"주영아."
"깼어요?... 형, 술 마셨어요?"

강현이 몸을 일으키자 술 냄새가 풍겼다. 강현은 무안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나가려는 주영을 불러 세웠다.

"강찬이 코 엄청 골아. 여기서 자."

'대학 가니까 어때요?' 주영이 찬 물을 가져와 강현에게 내밀며 물었다. 강현은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다 마셔버리더니 빈 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별 거 없더라? 공부도 여전하고 사람도 여전하고. 책임은 늘어나고 고민은 많아지고, 나이는 먹고. 멋지지 뭐.' 주영은 책상 의자를 뺀 후 걸터앉았다. 무릎에 머리를 댄 채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뭔가 쓰고 있는 강현을 보며 이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가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 생각했다. 뭐라도 달라지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달라지는 게 나이뿐이라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주영아. 나 오늘 처음으로 무대가 무서워졌어. 거기 서 있는 내가 무서워졌어. 내가 할 수 있나,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앞이 안 보이더라."
"부담감 때문 아니에요? 그럴 수 있잖아요. 그 부담, 불안이라는 게 사람 미치게 하는 거죠."
"넌 괜찮아? 너한테 괜찮냐고 물어도 괜찮은 건지... 고민 엄청 했었는데."
"엄마 돌아가시고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는데, 어떤 때는 막 티 내고 싶거든요? 나 힘들다. 아프다, 울고 싶다. 다 집어치우고 싶고, 하나도 안 괜찮다. 그런그걸 못해요. 내 마음 같은 건 모른 척하고 그냥 살면 되나 싶어요."
"버티지 말고 그냥 되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
"형, 뭐라고 쓰는 거예요?"

손가락이 멈췄다. 말없이 웃던 강현이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대고 쓰기 시작했다. '뻔뻔하네. 사랑하듯 상처 주면서.' 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강현의 손 끝을 바라보았다. '내 대산데 교수님이 무슨 의민지 아냐고 물으시는 거야. 나는 모르지. 모르더라고 그 감정을. 넌 알겠어?'

"알 것 같아요."
"정말?"
"네. 알 것 같아요."
"내가 너한테 배워야겠네. 난 정말 모르겠는데. 주영아, 이리 와 옆에 앉아 봐."

주영이 옆에 앉자 강현은 주영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너 누구한테 기댄 적 없지?' 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면, 또 그 사람이 내 편이다 라고 생각하면 아주 조금이지만 힘이 나. 하루만 더 버텨보자. 그만두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그런 마음으로.' 주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이라도 하듯 눈을 깜빡였다. 방구석에 머물러있던 시선이 의자로 옮겨졌다가 강현의 대사가 씌었다 사라진 허공에 머물렀다. 집 앞의 가로등이 꺼지자 캄캄한 방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은 위로받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보내는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버틴 것 같았다.

"고맙다. 네 덕분에 위로받았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간절하게 누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주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지키지 못했던 엄마의 마지막 순간. 두고두고 자신을 칠 자책과 시간이 지나면 고민이 무색하게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 거라 했던 누군가의 위로. 아직도 맴도는 주문 같은,  습관 같던 말들이 갑자기 거꾸로 가게 된 시계에 앉은 먼지처럼 조용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중략)


무뎌지려면 바람을 맞아야 하잖아
꿈속에서는 영원할 수가 없잖아
힘내란 뿌연 말 대신 다 그럴듯한 거짓말 대신
그저 이 모든 바람 바람처럼 지나가길 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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