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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13. 2020

예민한 여자와 무던한 남자

정반대의 두 사람




나는 20대를 거의 연애하지 않고 보냈다. 만나는 사람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매번 사계절을 채 넘기지 못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나는 상대방의 많은 것들이 거슬렸고 그들은 그런 나를 거슬려했다.


이런 내게 ‘결혼’은 다른 세계 이야기였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지만,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결혼이라는 제도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남남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던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건 예민한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그들의 영향이 크다. 엄청난 사건 사고는 없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늘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봐 오며,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결혼은 별로 행복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혼자 사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에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혼자 사는 삶에 대해 꿈꿔왔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지만, 혹시 내가 결혼을 원했을지라도 비자발적으로도 역시 결혼은 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나는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인데 이런 내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가 먼저 의문이었다. 연애도 어려운데 결혼까지 결심할 정도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까? 둘째로,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게 되더라도 그 사람도 나를 결혼 상대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한들 결혼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미디어에서 비치는 부부들을 포함해도 결혼을 해서 행복해 보이는 케이스는 찾기 어려웠다. 모두 서로에게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유부남, 유부녀들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들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늘 비관적인 편이었던 나는 결혼이라는 건 불행의 늪으로 자발적으로 점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n년동안 가져왔던 내 결혼에 대한 생각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바뀌게 되었다. 회사에서 만난 남편은 나의 1년 선배로,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친한 사람들이 겹쳐 알게 되었다. 그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실없는 사람이었고 외모도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다 함께 몇 번 만나면서 그 장난 속에 숨은 그의 진짜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까다로운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외모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남편 미안) 인상이 좋은 편이었고 나는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까다롭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그 또한 마음에 들어해 친구들과 주말에 1박 2일로 놀러 갔던 여행을 계기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나기 시작했다.


만나기 시작하면서 더 깊게 알게 된 그는 훨씬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도 물론 예민하게 반응하는 특정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평상시에는 오히려 무던한 사람에 가까웠다. 예민한 사람이 예민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대혼란이 펼쳐질 텐데, 웬만하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무던한 그와 취향이 확고하고 호불호가 강한 나는 꽤나 잘 맞았다. 



이 노래를 안다면 당신은 최소 90년대생



앞서 서술했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나는 그를 만나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그 결혼이라는 것이 어쩌면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남편의 모든 장점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로 남편의 장점 몇 가지만 써 보겠다.


성실함

쓸 때 쓰고 아낄 때 아낄 줄 아는 것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약자에게 공감할 줄 아는 사람

긍정적인 사고와 근거 없는 자신감

비 가부장적인 태도


무엇보다 그는 내가 아는 모든 남자 중 가장 허세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허세라는 건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해 자주 이용되곤 하는데, 그는 허세 없는 자신감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었다. 허세를 극혐하는 내게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고 진실되게 다가왔다. 남편 역시 이전까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다고 나에게는 말했)는데, 만나기 시작한 지 2주 만에 나에게 같이 살자(?)라는 고백을 했다. 굉장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 또한 이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긍정적인 사람이라면 같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이 사람과 함께 하면 즐거운 삶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당연히 연애 초기의 두꺼운 콩깍지가 아주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우리의 의지와 적금 시기 등이 맞아떨어져 어쩌다 보니 우리는 연애 1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물일곱,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이렇게 쓰니 예민하다고- 예민하다고- 하면서 예민한 사람 치고는 너무 쉽게 결혼한 것 같아 뻘쭘하긴 한데, 나 같은 사람이 확신이 들기가 어렵지 한 번 확신이 들면 앞 뒤 안 보고 돌진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만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건 솔직히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나의 경우 남편을 회사에서 만났지만 친한 친구들이 겹쳤고 그들은 남편을 대학교 때부터 잘 알던 사람들이었기에 허튼 사람이 아님이 자연스레 증명되었다. 만약 이게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결혼과는 담쌓은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도 남들 다 하는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도 남들 다 하는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긴 했지만 결혼에 대해 환상이 없었던 나는 결혼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알았고 완벽하지 않을 것임도 잘 알았다. 그러나 결혼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들에서 여러 번 뒤통수를 쳤다. 아예 몰랐던 사람과 한 집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산다는 것은 그것부터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우리에게 그것은 안 맞는 신발을 억지로 구겨 넣는 것과 같아 보였다. 결혼 4년 차인 지금까지도 우리는 종종 작거나 큰 다툼을 하고 가끔은 서로를 미친 듯이 미워하기도 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들이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예민한 나는 많은 것들이 거슬리고 그런 나를 남편은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화가 난다. 남편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왜 자신을 탓하냐며 화를 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냥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 달라고!”



결혼 전, 처음으로 함께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남편은 그때까지는 출장이나 대외활동이 아닌 단순 여행으로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었기에 굉장히 설레어하며 나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말했다. 자유여행 경험이 많았던 내가 호텔과 비행기 예약을 담당했고 일정까지 직접 다 짜기로 했다. 나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미리 수영복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혹시 수영복이 없다면 미리 주문해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말을 했고 그는 그때마다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여행 바로 전 날, 짐을 싸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카톡으로 수영복이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몇 주 전부터 미리 이야기를 했는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는 게 증명된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거 하나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나?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나는 두 달 전부터 비행기랑 숙소 다 예약하고, 일정까지 다 짜고, 준비물도 미리 다 챙겨 놨는데! 오빠는 예약도, 계획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달랑 수영복 있는지 체크하는 거 그것 하나도 못 해? 두 달 전부터 미리 말했는데 알겠다며! 나만 맨날 여행 이야기하고, 내가 다 준비하고. 누가 보면 나만 가고 싶어 하는 줄 알겠어! 자기가 먼저 가자고 했으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처음으로 크게 화를 내자 그도 당황했다. 고작 수영복 하나 가지고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냐고, 그냥 가서 아무거나 싼 거 하나 사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수영복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내가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성의 없이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서운했고, 내가 그에게 딱 하나 부탁했던 것을 지금까지 무시해왔다는 생각에 화가 났던 거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 일로 여행을 통째로 취소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극적으로 화해해 비행기에 올랐고 세부에 도착해 우리 리조트에서 딱 하나 남아있던 형광 주황색 수영복을 구매할 수 있었다. 여행은 즐거웠다. 나 또한 동남아는 처음이었는데 저렴한 물가에 풍족하게 놀 수 있어 신세계라는 느낌을 받았다. 또 막상 여행을 가니 남편은 내가 짜 둔 여행 계획을 나서서 실행에 옮겼고 덕분에 나도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도 생각해 보니 별 것도 아닌 걸로 그렇게 화를 냈다는 생각에 그에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계획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여행 경험이 많이 없었기에 아는 것도 없어 내가 뭔가를 이야기해도 그는 알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나는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부터 즐기는 스타일이라면, 그는 그냥 여행을 간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단순한 사람이라서 그랬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나와 실행력이 뛰어난 그는 정 반대였지만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이후 우리는 여러 번의 여행을 했다. 2019년에는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계획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을 짤 수 있었다. 내가 조사해둔 정보들과 짜 둔 계획을 바탕으로 남편은 현지에 도착해 바로바로 실행에 옮겼다. 알고 보니 우리의 팀워크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물론 여행 중간 싸운 적도 있지만, 잘 화해하며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여행이 끝난 우리의 일상 또한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평소 남편이 놓치는 세세한 부분들은 내가 챙기고, 남편은 큼직큼직한 것들을 실행에 옮긴다. 물론 다른 사람이기에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서로가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예민해하는 부분이 어떤 것들인지를. 그리고 간혹 다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풀면 좋은지를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조금씩 맞춰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하는 이유가 이렇게 정 반대이기 때문이지만, 또 가끔 혹은 자주 우리가 부딪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우리는 정 반대라서 사랑하고, 정 반대라서 서로를 미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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